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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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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간체:毛泽东, 번체:毛澤東, 병음:Máo Zédōng, 한국어 한자음:모택동)(1893년 12월 26일 ~ 1976년 9월 9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혁명가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초대 중국 공산당의 주석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창립당원이었으며, 창당후 계속된 혁명활동으로 13명의 당원에 불과하던 중국 공산당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

수십년의 내전 끝에 봉건군벌 연합체인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을 무찌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하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집권 후 대약진은동 문화대혁명같은 과오로 수많은 중국 인민이 희생되고, 문화 파괴가 일어났다. 이런 오류는 그의 사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비판되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은 공7과3란 말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을 정리하고 있다.

초기 이력[편집 | 원본 편집]

청나라 시절의 후난 성 사오산 마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마오이창은 빈농에서 자수성가한 부농이었고, 어머니인 원치메이는 순종적인 여인이었다. 마오는 어머니를 따라 처음에는 불교를 신봉했으나, 10대에 들어 무신론자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8세부터 서당에 들어가 유교경전을 공부했으나, 곧 공부에 흥미를 잃고 삼국지나 수호전 같은 작품을 탐독했다고 한다. 13세에 서당을 졸업하고, 아버지가 중매한 여인과 명목상 결혼을 했으나, 마오쩌둥은 이 결혼을 거부하고 가출했다.

마오쩌둥은 서당 졸업후 여러 독서를 통해 서양사상을 접했고, 서양 학문을 동경하게 된다. 그는 16세에 대도시인 창사로 가서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 쑨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공화주의에 물들게 된다. 그해에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마오쩌둥은 혁명군에 가담했고, 신해혁명이 성공하여 제정이 폐지되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마오쩌둥은 다시 학업으로 되돌아 왔다.

마오쩌둥은 혁명이 끝난 이후 여러 학교를 전전했으나, 모두 얼마 안가 중퇴하고 마지막으로 창사 제4사범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마오쩌둥은 이 학교에서 철학교사 양창지를 알게 되고, 그 딸 양카이후이와 사귀게 된다. 양창지는 베이징 대학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고,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마오쩌둥은 스승을 따라 베이징 대학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게 된다. 이때 그는 베이징 대학 도서관에서 폭넓은 녹서를 했는데, 공산주의 서적보다는 철학서적을 더 즐겨 있었다. 또한 당시 베이징에 있던 여러 중국철학대가들 (후스, 천두슈, 슝스리, 리다자오 등등)의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다. 이렇게 독서과 강의로 자신의 사상적 토대를 닦았다.

1919년 마오쩌둥은 창사로 돌아와서 잠시 교사일을 했으며, 1920년 양카이후이와 결혼한다. 1921년 다른 몇명의 동지들과 함께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다. 창당 당시 마오쩌둥은 회의 서기를 맡아보았으나, 지도적 위치는 아니었다.

혁명활동[편집 | 원본 편집]

제1차 국공합작[편집 | 원본 편집]

1917년 러시아에서는 10월 혁명이 발발하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블라디미르 레닌 및 소련정권은 제국주의에 대한 포위를 뚫기 위해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에 신음하고 있었던 중화민국에 주목하고 있었다.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나라 제정을 무너뜨린 중국 혁명가 쑨원은 당시 실각하여 남부 광둥성에 피난하여 있었고, 중화민국 베이징정부는 북양군벌 후예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중국을 근대화시키기는 커녕 권력다툼만 일삼으며 중국의 이권을 외국에 팔아넘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쑨원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국을 반식민지상태로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소련의 제안을 잡아 손을 잡는데 합의한다. 이로서 국공합작이 성립되었고, 중국 공산당 당원들은 소련에 본부를 둔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태로 국민당 당적또한 갖게 된다. 마오쩌둥도 국민당에 입당하여 여러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중 하나가 후난 성 농민보고서였고, 이때 그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간과했던 농민들의 혁명성을 인식, 훗날 자신의 혁명운동의 중심을 농민에 두게 된다.

쑨원은 곧 소련의 지원을 받아 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여기서 양성한 군지휘관들을 토대로 베이징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다. 북벌은 순조로웠으나, 쑨원은 북벌 도중 사망하고, 국민당은 여러 계파의 집단지도체제가 되지만, 북벌군의 지휘를 맡고 있었던 장제스가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장제스는 쑨원과는 달리 반공성향을 띠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공산당을 국민당 내에서 추방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공산당 고위직은 장제스를 불신하고 있었다. 1927년 장제스는 북벌군을 이끌고 군벌 및 해외열강들의조계가 자리잡고 있던 상하이를 공략했고, 공산당원들은 상하이 내부에서 총파업을 일으켜 장제스를 환영했으나, 장제스 상하이가 함락되자마자 자신의 군대와 상하이 내의 깡패들을 이용해 자신들을 도왔던 공산당원에 대한 학살극을 벌였다. 이 때 중국 공산당원의 70%이상이 학살되었고,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은 장제스의 학살을 피해 지하로 숨게 된다. 이 사건을 4.12 상하이 쿠데타라고 한다. 공산당은 복수를 위해 봉기를 계획했고, 8월 1일 난창봉기를 시작으로 여러차례 장제스에 대한 무력봉기를 벌였으나, 장제스의 압도적인 병력에 의해 모두 참패로 끝났다.

한편 마오쩌둥은 후난 성에서 이 소식을 듣고, 9월 당의 명령에 따라 병력을 모아 봉기를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도 장제스의 대군에 참패했고, 나머지 패잔병을 이끌고 남방의 장시성 징강산(정강산)으로 도피하게 된다.

정강산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장제스의 배신을 응징하기 위한 공산당의 봉기는 대부분 진압당하고, 공산당원들은 수배자가 되어 은신하거나 혹은 홍콩 또는 소련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마오쩌둥도 1927년 9월 창사에서 봉기했으나, 장제스의 압도적 병력에 의해 참패했고, 1000여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후난성과 장시성 경계에 위치한 징강산(정강산)으로 도피했다. 이곳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전의 중국의 군대와는 달리 절대로 민폐를 못끼치게 하는 군율을 확립했다. 병력은 1개 연대급이었으나, 마오쩌둥은 자기 부대를 홍군 제1사단 1연대라고 지칭했다. 또한 주변의 산적들까지 포섭해 자신의 부대에 합류시켰다.

이후 마찬가지로 난창 봉기를 지휘했다가 패한 주더도 징강산으로 도피해왔다.

서금 소비에트[편집 | 원본 편집]

1~4차 초공전[편집 | 원본 편집]

1930년 7월 펑더화이가 주도한 창사봉기가 일어나서 창사가 공산당에 일시적으로 점령되었다. 국민당은 반격을 가해서 창사를 수복했고, 장제스는 공산당의 세력을 분쇄하기 위한 대규모 작전을 개시했다. 장제스는 11월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1차 초공작전을 시작했고, 마오쩌둥과 주더가 거느린 홍군은 4만에 불과했다. 장제스군은 기세좋게 진격했으나 1931년 1월 참패하고, 참가한 사단 대부분이 전멸했다. 여기에 막대한 물자까지 노획해서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가리켜 "장제스는 홍군의 보급부장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제2차 초공전은 1차초공전이 참패로 끝난 3개월 후인 1931년 4월에 시작하였다. 1차때보다 2배 많은 20만의 병력으로 해방구를 공격해왔으나, 5월에 역시 참패하고 공산당의 영역은 세배로 늘어났다.

제3차 초공전은 다시 두달 후인 7월에 시작했다. 이번에는 10만의 병력을 늘려 30만으로 해방구를 침공해 들어왔다. 홍군은 1,2차때와 비슷한 3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장제스 본인이 직접 총사령관을 맡았다. 장제스는 기세좋게 쳐들어갔으나 홍군이 기동전에 말려 고전했고,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자 결국 작전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세번의 초공작전에서 참패한 장제스는 1년간 치밀한 준비를 한후 1933년 1월 50만의 병력으로 다시 침공해왔다. 이것을 제4차 초공전이라고 하는데 홍군은 1,2,3차에 걸친 포위전 승리 및 영역 확대로 7만명의 병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홍군은 압도적인 적의 병력때문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장제스군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장제스군은 일본군-만주국군이 열하성 (현재의 하북성 일대)을 침공했기 때문에 더이상 작전을 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4차 초공전도 홍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명박근혜에 국정원, 기무사, 경찰과 같은 권력기관 및 삼성의 지원으로 독버섯처럼 피어난 넷역덕 및 일부 밀덕들은 이러한 홍군의 승리를 평가절하하며, 장제스군은 "일본군이 침공해 와서 어쩔수 없이 작전을 중단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나무위키나 자신의 역덕 커뮤니티 혹은 블로그에서 이런 썰을 펴면서 대중을 현혹시키고 있는데, 홍군과 국민당군의 병력 수가 1:3~1:10까지 벌어지는 상황에서 저렇게 장제스가 홍군을 섬멸하기는 커녕 고전하다가 작전을 중단한 것은 어떻게 봐도 장제스군이 참패한 것이다. 이는 홍군이 국민당군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고 유능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장제스는 일본군의 침략에 대한 대응을 자신과는 거의 인연이 없는 지방군에 맡기고 거의 구경만 했으며, 자신이 육성한 정예부대는 모두 홍군에 대한 작전에 투입했다가 날려먹는 무능을 보였다. 장제스 자체가 이렇게 국토의 보존보다는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움직이는 자였기 때문에 이후에 중국 민중은 진정한 항일은 장제스가 아니라 공산당이 했다고 생각한 것이며, 이는 넷역덕 및 극우밀덕들이 주장하듯이 "공산당의 선전에 넘어간 것"이어서가 아니라 장제스 본인이 저런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5차 초공전[편집 | 원본 편집]

장제스는 압도적 병력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의 해방구를 토벌하기 위한 4차례의 토벌전에서 모두 실패했다. 한편 공산당 측도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상대하다보니 상당한 피해를 보았으며, 제4차 초공전에서는 해방구의 몇개 지역이 붕괴하고 서쪽으로로 이동했다. 여기에다가 코민테른 (그리고 코민테른을 실질적으로 지도하는 스탈린)의 후광으로 마오쩌둥을 밀어내고 당권을 잡은 세력 (소위 28인의 볼셰비키)들은 소련에서 파견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의 지도 아래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정면전을 벌이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그동안의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하고, 독일인 군사고문과 공군을 확충했다. 1933년에 장제스는 나치 독일의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kt)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하고, 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1933년 9월 65개사단 100만 대군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독일인 군사고문 한스 폰 젝트 장군의 조언을 받아 해방구를 둘러싼 3방향에서 토치카를 건설하면서 배후 마을을 점령하고, 완전 경제봉쇄를 단행하는 전법을 사용해 해방구를 조여왔다. 이에 맞서는 홍군은 약13만이었다. 결과적으로 해방구는 포위되었으며, 가만히 있다가는 포위망에 갖혀 몰살당할 판이었다. 결국 11월 10일 혁명의 수도 루이진(서금)은 국민당군에 함락되었다. 하지만 해방구를 지키던 홍군 제1방면군과 공산당 지도부는 국만당군의 포위를 뚫고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것을 대장정이라고 한다.

대장정[편집 | 원본 편집]

준의회의[편집 | 원본 편집]

쭌이 회의 참조.

장정 기간중 귀주성 준의(구이저우성 쭌이)에서 열린 준의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당권과 군권을 되찾았다.

옌안 도착[편집 | 원본 편집]

시안 사변과 제2차 국공합작[편집 | 원본 편집]

대장정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추격과 군사적 압박은 여전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계기로 ‘부르주아 계급을 포함한 광범위한 반파시스트 연합전선전략’이 강조됨에 따라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항일투쟁의 목소리를 높였고, 국민당에게도 항일연합전선을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국민당은 공산당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기에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1936년 12월 12일 이른바 시안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는 신속히 진행되어 그날 아침 6시까지는 모든 일이 끝났다. 국민당 측의 동북군과 서북군은 시안을 완전히 장악했고, 자다가 기습을 당한 남의사 병력은 무장해제당한 뒤 체포되었으며, 참모부 요원 전원은 시안 영빈관 숙소에서 포위당해 사실상 구금 상태에 놓였다. 경찰국장 사오리쯔가 사로잡혔으며, 이에따라 시안 시 경찰은 모두 반란군에게 투항했다. 난징 정부의 폭격기 50대와 조종사들은 비행장에 억류당했다. 장제스를 체포하는 과정에선 양측간의 교전이 일어났다. 새벽 5시에 장제스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전개되었고, 궁극적으로 장제스는 체포됐다. 시안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장제스에게 요구한 것은 8개 항목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공동책임을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즉각 전면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 7명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 박사의 유지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이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은 바로 만주 군벌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이었다. 장제스를 체포한 군인들은 장제스에게 “각하를 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들은 단지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과 싸우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장학량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쿠데타 이후 장학량은 중앙정부와 각 성의 지도자 그리고 중국인에게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으며, “총통이 각성하도록 당분간 서안에 체류하도록 요청”했다. 즉 앞에서 언급한 8개 항목에 대한 발표인 것이다.

장제스는 만주사변 이후 전쟁 준비를 안한 것은 아니었으나, 공산당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치욕적인 양보를 거듭했다. 즉 이런 부분에서 마오쩌둥은 국민당에 대해 “부끄러운 무저항 정책을 추친하며 중국의 국가이익을 팔아넘기고 있다.”라고 주장했던 것이고, 이것이 핵심적 맥락이다. 시안사건에서 장제스를 구금했던 장학량은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장작림의 아들이었다. 장작림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은 1931년 만주사변 과정에서 굴욕적인 양보를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이행해야 했다. 따라서 그의 시각에선 합리적으로 장제스가 “항일전은 안하고 공산당 토벌에만 앞장서고 있다.” 판달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장제스는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 공산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항일 전쟁[편집 | 원본 편집]

시안사건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개시되자 마오쩌둥의 홍군은 형식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18방면군 8로군이라는 명칭으로 항일전에 참전했다. 국공합작이 성립된 직후인 1937년 중국을 야금야금 삼키던 일본은 전면전을 개시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국민당군은 1937~8년에 양자강 하구 전투 (상하이, 난징 방면)에서 참패했고, 대부분의 전력을 잃었으며, 수도를 버리고 계속 후퇴하다가 충칭까지 밀렸다. 일본군은 난징 함락후 국민당이 버리고 간 중국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팔로군도 국공합작에 따라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국민당과는 달리 북중국에서 주로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상대하였다. 일본군은 처음에는 공산군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점점 게릴라전에서 피해가 커지자 팔로군을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팔로군은 국민당군이 철수하여 행정조직이 없어진 촌락을 장악하면서 게릴라전의 배후지를 조성했는데, 아래 설명할 극우밀덕들은 "공산군이 항일은 하지 않고 세력만 늘렸다"는 식으로 왜곡하기도 한다.

1940년 팔로군은 화북지역에서 100개의 연대를 동원한 백단대전을 벌여 두달간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고, 여기에 발끈한 일본군은 게릴라전의 배후를 없애기 위해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빼앗는다는 삼광작전이라는 보복을 벌였다. 이 작전의 내용은 팔로군의 작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촌락을 모두 초토화하고 주민을 학살한다는 것이다. 만약 장제스빠 극우역덕들의 주장대로 공산군이 항일전을 구경만 하면서 세력확장에만 몰두했다면, 왜 일본군이 이런 학살극을 벌였겠는가?

이렇게 중국공산당의 항일전 기여는 명백한데도, 이명박-박근혜 시절 극우의 온상인 일베와 디시를 중심으로 양성된 우경화된 아마추어 밀덕-역덕을 중심으로, 나무위키와 이글루스 블로그에서 냉전시절에 펴낸 국민당측 자료를 근거로 삼아 "국민당이 항일을 다했고, 공산당 (팔로군 및 신사군)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일단 개전 시점에서 국민당이 200만 대군, 공산당이 3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는데다가, 공산당 주력은 산시성의 오지에 있었고, 장정에서 낙오된 일부 부대들이 중국 남부에 산재하고 잇었던 반면, 국민당은 중국 동해안의 여러 거점도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중일전쟁 초기에 일본군의 주공이 국민당을 향하게 되었고, 일본군의 목표가 된 국민당이 대규모 회전을 벌일 동안, 내륙에 있던 공산당이 소규모 작전만 벌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나무위키나 이글루스의 친장제스 밀덕들은 이런 상황을 "공산당이 항일전에 나서지 않고 옌안에 쳐박혀 있었다"며 역사왜곡을 일삼고 있다. 또한 국민당이 남부에서 참패할 동안 공산당은 화북에서 계속 촌락민들을 조직해서 게릴라전을 벌엿으며, 이들의 활동때문에 일본군의 소위 삼광작전이 벌어졌는데도, 대규모 회전만을 눈에 띤 군사활동이라고 주장하는 친장제스 밀덕들은 이런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장제스가 주력이 붕괴된 1941년 이후에는 아무 항전을 하지 못한 것은 "전략적인 지구전"이고, 공산당이 삼광작전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한 것은 "비겁한 도피"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친장제스 밀덕들은 이렇게 화북의 배후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면서 세력이 커진 공산당이 마치 "장제스 뒤통수를 쳤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장제스가 행정력을 펴지 못하는 공백지에서 사실상 정부역할을 하며 게릴라전을 수행한 것을 뒤통수를 쳤다고 주장하는 어이가 없는 일.

이런 나무위키 극우역덕들은 아예 "중일전쟁/오해"라는 항목에서 마치 팩트체크를 하는 것처럼 중국공산당의 항전을 높이 평가하는 기존 학계의 설을 뒤집고, 자신들만의 썰을 풀고 있으나 오히려 이 항목이야말로 사실왜곡과 과장의 절정이며, 이는 나무위키의 대표적인 역사왜곡이다. 이는 마치 환빠가 한국고대사/오해라고 항목을 개설하고 환단고기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과 마찬가지의 수준이다. 특히 이 항목의 대부분은 모 밀덕이 작성한 "중일전쟁"이라는 책에 기반하고 있는데, 그 밀덕은 역사학의 기본이 안된 공대출신 (현직 공무원) 아마추어이며, 역사서적을 작성할만한 사료해석이나 사료비판능력은 전무한 사람이다. 이사람은 이미 대만에서조차 "무자비한 독재자"라고 역사적 평가가 끝난 장제스를 광적으로 옹호하고 있는데 (물론 자기는 장제스빠아니라는 트윗을 하곤 있는데, 책내용을 보면 "장제스 연의"에 가깝다), 역사관을 그대로 깔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 필요가 있다.

역사학계, 심지어 중국 본토에서도 그동안 장제스의 항일전 수행이 비하되었던 것에 대해서 재조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당이 전혀 항일을 안했다는 이런 친장제스 밀덕들의 주장은 디쾨터와 같은 극우역사학자가 아니면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설이다. 이들은 항일을 하지 않은 공산당이 민심이 얻은 것은 "그저 선전전에 능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장제스가 민주주의자라고 미화를 시도하는데, 장제스 당시 중국은 공산당 못지 않은 일당독재였으며, 대만시절이나 대륙시절이나 장제스는 전형적인 철권통치를 휘두른 군사독재자라는 사실을 감추려 시도하고 있다.

제2차 국공내전[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8월 15일 항일전쟁이 끝난 후 국민당과 공산당 측은 평화로운 신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여러번 협상을 벌였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미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위해 조지 마셜 장군을 파견했지만, 양측은 쉽게 합의가 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1당독재를 펴고 있었던 국민당측이 연립정부를 구성할리 만무했다. 게다가 국민당은 당시 공산당을 무력으로 압도했기 때문에, 공산당에게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다. 당시 국민당군은 미국이 원조해 준 물자 및 일본군이 남기고 간 무기를 대부분 흡수하여 500만이라는 대병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화북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한 게릴라전을 펴면서 성장하던 공산군에 비해 거의 4-5배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충칭에서 만나 평화롭게 신정부를 구성하기로 협정을 맺었으나, 이를 깨고 선공을 한 것은 국민당군이었다. 국민당군은 대병력과 수많은 장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도부는 부패한데다가 무능했기 때문에 거의 중국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공산군은 비록 병력 수는 적었지만, 농민들에게 토지개혁을 약속함으로써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1946년 3월 국민당군은 100만대군으로 공산군의 본거지인 산시성 옌안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했다. 1946년 5월 미군사고문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정예부대를 대거 투입하여 만주지역의 대도시를 점령했고, 1946년 7월부터는 공산당의 거점지역에 대한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군사적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1946년 7월부터 12월 사이 중국의 국민당군은 공산당이 지배하던 수많은 해방구 영토를 점령했고, 1947년 3월에는 인민해방군의 중심지인 연안까지 점령했다. 마오쩌둥의 군사전략상, 적의 주력과는 싸우지 않는다는 방침이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을 비롯한 지휘부는 공산군은 옌안을 비우고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국민당군은 빈 옌안을 함락시킬 수 있었으나, 공산당 주력은 이미 도피한지 오래였다. 공산군은 국공합작시절의 정식명칭인 팔로군의 이름을 인민해방군으로 바꾸고 중국 전역에서 게릴라전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은 도시를 장악하며 승리를 자신했으나 공산군의 게릴라전으로 보급로가 끊기면서 실제로는 인민의 바다에 수장되고 있었다. 특히 장제스는 북벌당시의 경험으로 거점장악을 우선시하면서 병력을 분산시켰는데, 이는 공산군이 익숙한 게릴라전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1948년 린뱌오가 이끄는 제4아전군이 만주지역에서 국민당군을 포위했고, 보급로가 끊긴 국민당군은 항복했다. 여기서 중국혁명을 악의적으로 서술하는 디쾨터나 극우 밀덕들은 공산당이 창춘 포위전에서 민중을 인질로 삼아 포위전을 펼쳐서 20만명의 아사자가 났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포위망에 걸린 국민당군이 민간인의 식량을 징발하면서 민간인이 아사한 사태를 교묘히 공산당의 인명경시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봐도 포위한 공산군보다는 보급선이 끊기고 포위를 당했는데 빨리 항복하지 않고 민간인의 식량을 빼앗은 국민당군이 더 책임이 있지 않은가? 장제스를 옹호하는 밀덕-역덕들은 항상 이런식으로 역사를 왜곡했다.

여기에 국민당은 과도한 전비지출을 하면서 초인플레이션을 빚었고, 이를 해결한답시고 화폐개혁을 하다가 국민당의 지지기반인 상하이지역의 경제가 붕괴, 결국 국민당의 본거지 상하이-저장성-장쑤성에서조차 민심이 떠나버렸다. 린뱌오군은 1949년초 국민당군을 일소하고 만주를 완전 장악한 후 산해관을 넘어 베이핑(베이징)에 육박해왔다. 베이징을 지키던 푸쭤이는 포위되자 문화재로 가득한 천년고도가 불탈 것을 우려해 도시는 명도하되 자신의 부대는 안전하게 포위망을 통과할 수 있도록 공산군과 신사협정을 맺었다. 결국 1949년 2월 포위되었던 국민당군이 무사히 후퇴하는 가운데 공산군은 베이징에 무혈로 입성했다.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부패한 장제스 정권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비슷한 시기 1947년 미국의 해리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이라 하여,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목적의식을 공개적으로 천명함과 동시에, 국민당 정권을 지원했다. 1947년 10월 미국은 국민당에게 2,77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해줬고, 전쟁 기간 동안 총 20억 달러나 되는 원조를 장제스에게 해줬다. 즉 이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수적 열세에 있던 중국 공산당에게 패배한 것이다.

베이징이 함락되자 곧 장강이북은 완전히 공산군에 넘어갔다. 다급한 장제스는 형식상 사임하고, 허수아비인 리쭝런을 내세워 공산군과 양쯔강(장강)을 경계로 남북을 분할해 지배하자고 제의했으나, 승기를 잡은 공산군이 이에 응할 필요가 없었고, 공산군은 1942년 4월 양쯔강 도하작전을 실시했다. 국민당군은 내부 반란까지 일어나서 공산군에 가담했고, 결국 4월 23일 수도 난징이 함락되었고, 5월에는 상하이가 함락되었다. 이어 12월에는 서부의 청두까지 함락됨으로써 국민당군은 대륙에서 발판을 잃고 완전히 대만으로 쫓겨났다.

장제스빠 극우밀덕의 설에 따르면 국민당이 피투성이가 되어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공산당은 세력확장에 몰두하여, 전혀 항일을 안했다고 한다. 그그 주장대로라면 공산군측은 당연히 실전경험도 국민당군에 비해 매우 적었을텐데, 실제로는 공산군은 대규모 작전에서 국민당군을 압도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사람들은 이런 능력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그러니 "공산군에 선전전에 속아넘어간 민중이 국민당을 버렸다"는 식의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당의 정책이나 업적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선전이나 언플 자체도 집권을 위한 당의 능력이며, 이를 죄악시하는 것도 어이가 없을 따름. "선전을 못해 정권을 빼앗기고 국공내전에서 패했다"고 주장하는 장제스빠 밀덕들은 아이러니하게 국민당의 무능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의 승리가 확실해진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을 수도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집권시절[편집 | 원본 편집]

사회개혁조치[편집 | 원본 편집]

공산당은 집권후 중국 전토에서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토지개혁의 기본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고, 농민을 괴롭히던 악질적인 지주들이나 부패한 관리들은 대규모로 처단되었다. 중국 농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게 되었으며 적어도 대약진운동 이전인 1958년까지는 농업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그에 발맞춰 인구도 폭증했다.

그런데 극우 역덕들은 혁명하에서 지배계급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들을 마치 아무 이유없는 학살처럼 악마화하고 있다. 이들은 혁명은 무조건 나쁜것이며, 사회질서는 정의롭지 못해도 무조건 유지되어야 한다는 극보수적인 사고를 깔고 있기 때문에, 근대사의 시작인 프랑스 혁명이나, 현대사의 시작인 러시아 혁명조차도 부정적으로 기술하기 마련인데, 특히 최근에 한국에 퍼진 혐중감정을 바탕으로 중국 혁명에 대해서는 더 나쁘게 묘사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집권 과정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미국 정부기관인 역사청 (Office of Historian) 조차 중국 혁명(Chinese Revolution)으로 부르고 있으며 [1] 혁명에 수반되는 지배계급의 숙청을 학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 무지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소위 이런 지배계급 청산과정에서 처형당한 악질 지주들의 수도 이들은 상당히 과장하고 있다.

또한 남녀평등이 제도화되고, 축첩이나 전족같은 봉건시대의 악습이 철폐되었다. 전국민에 대한 의무교육이 도입되었으며, 삼합회나 청방, 그리고 마약상과 같은 범죄조직들도 대규모로 소탕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로 청조가 몰락했지만 본격적인 근대화조치들은 거의 실시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이 미뤄왔던 근대화조치들을 과감히 실시하였다.

한국전쟁[편집 | 원본 편집]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기가 무섭게 냉전의 화약은 한반도에서 터졌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공격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한국군과 유엔군의 거듭후퇴를 하여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에 나섰고, 9월 28일에는 서울에 입성했다. 더나아가 10월 1일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서 북한으로 진격해왔다. 문제는 1950년 10월 쯤 한국군과 더불어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면서 생겼다. 중국은 미군이 북진하면서 한국전쟁을 자신들의 영토까지 확장할 것을 두려워 했고, 한국전쟁 패배시 대만에 국민당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승리의 대가로 자신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온다면 난처해 질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0월 13일 참전을 전격 결정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는 참전에 반대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1950년 10월 25일 마오쩌둥은 한반도에 군대를 투입했고, 밀리고 있던 인민군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1951년에는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용인 및으로 까지 진격했지만, 유엔군이 다시 반격을 가하며 한국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까지 휴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마오쩌둥이 파견한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은 유엔군과 마찬가지로 대략 2년간 휴전선 근처에서 전투를 치렀다. 한국 전쟁이 끝난 이후 북한에 주둔하게 된 중공군은 북한의 재건을 도왔고, 대약진운동이 중국내에서 시작되던 1958년 북한에서 완벽히 철수한다.

한국 전쟁 당시 100만 이상의 병력을 파견했던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서 자신의 아들인 마오안잉을 잃었고, 최소 수십만의 병력을 한반도에서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당시 미군은 폭격의 범위를 북한에만 국한하지 않고, 북한과 중국 국경지대까지 범위를 넓혔는데,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중국 국경지대의 피해또한 적지않았다고 한다. 예를들면 중국과 북한 국경 근처에 있는 단둥의 경우 미군의 폭격을 극심하게 받았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한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사용한 폭탄 량이 63만 톤 이상이 되고, 이중 3만 톤 이상이 네이팜 폭탄이었다.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인하여 북한쪽의 인명손실을 100만 명 이상이 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자면, 중공군 사상자 또한 막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2년 6월 23일에 감행됐던 공습에서 미군은 항공모함 4척과 500대 이상의 항공기를 동원했었는데, 북의 수풍댐을 폭격하는 것과 동시에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 중국 영토를 침범하기도 했었다.

참고로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하면 인해전술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사실 중공군의 주 전략은 인해전술이 아니었다. 사실 인해전술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중공군과 미군이 대대적으로 맞붙었던, 장진호 전투에서 시작된다.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은 12만 명이 투입됐고,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들은 2만 명 이상이 투입됐는데, 중공군 측의 공격이 끊임없이 일어나다 보니,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미군 측 참전용사들이 '인해전술'을 연상하게 만드는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4만여명이 전사하고, 유엔군 2500명이 전사했는데. 당시 전투가 중공군의 수적으로 우세를 점했기에 인해전술이 됐던 것이지, 중공군의 전술전략 자체가 인해전술을 주로 구사하는 군대는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전술전략의 주는 게릴라 전이었다. 중국이 전쟁에 참전했을 시기 그들이 유리했던 점은 기후였다. 한국전쟁 당시 투입되었던 미군들은 주로 더운 지역이나 사막지대에서 훈련받았던 군대였고, 다른 유엔군들도 마찬가지로 추운 한반도 북쪽의 겨울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오쩌둥이 보낸 중국군은 추운 만주에서 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기에 미군보다 더 유리했다.

한국사람들이 마오쩌둥을 평가할 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바로 그가 단행했던 한국전쟁 파병에 관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마오쩌둥의 파병을 비판하는 세력들의 논리를 보면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가 통일을 할 수 있었는데 마오쩌둥이 이를 막아서 현재 통일이 되지 않았다.는 논리인데, 이는 역사적 지식이 전혀 없는 시각이나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 시킨 책임을 마오쩌둥에게 묻는 것 자체가 한반도가 어떻게 분단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반공적 논리를 가지고 분단의 책임을 묻는 사람들은 1945년 미군정의 건준과 인공 그리고 인민위원회의 강제해산과 모스크바3상회의에서의 왜곡보도,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이승만 세력의 방해 그리고 김구의 남북협상에서의 실패에 대해선 전혀 생각치 않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반도 분단이 어떻게 시작했고 그것이 어떻게 해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또 그런 분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전자에서 언급한 그 사례들은 분명히 한반도 분단을 막기 위한 시도였다. 그 시도를 방해하고 왜곡했던 세력들이 바로 남조선의 친일 세력들과 그들을 돕는 미국이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 마오쩌둥은 북조선을 지원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초기 북한의 주력부대 중 하나가 마오쩌둥으로 부터 받은 조선족 사단이었다. 이들은 중일전쟁과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 당시 중국 혁명을 위해 투쟁했던 혁명가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공을 세운 부대였다. 그런 역사은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북한이 미군에게 밀리자 파병을 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사례들은 전혀 보지 못하며 그저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의 참전으로 통일이 안됐다며 분단의 책임을 마오쩌둥에게 묻는 것은 몰역사적이고 반공주의적인 시각일 뿐이다.

백화제방 및 반우파운동[편집 | 원본 편집]

흐루쇼프의 집권으로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의 일환으로 스탈린의 독재정치가 비판되고 자유화조치가 일어나자 1957년 마오쩌둥도 이에 영향을 받아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허용하는 방향의 정책을 폈다. 이를 백가쟁명 백화제방운동이라고 한다. 마오쩌둥은 "백가지 꽃이 피고, 백가지 학파가 주장을 펴라"며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때문에 여러 목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공산당과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도 봇물터진 것처럼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장제스를 지지한다"는 시위마저 나왔다.

이렇게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방침을 바꾸어 "공산당에 대한 우파의 중상모략을 타도하자"며 반우파운동을 실시한다. 그리하여 백화제방 시기에 공산당을 매섭게 비판하던 지식인들은 도리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투옥되거나 강제노역에 끌려가기도 했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이 이렇게 갑자기 방침을 바꾼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마오쩌둥이 언론의 자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원인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는 소시적에는 왕조시대의 충효를 강조하는 봉건적인 유교 교육을 뼛속까지 깊이 받았으며, 혁명 운동 경력도 효율과 일사불란함이 강조되는 군사 지휘관 노릇으로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의 개념을 접해본 바 없었다. 마오쩌둥의 개인적 경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혁명운동에서 중구난방은 곧 참패로 이어졌고, 이는 준의회의 이후에 마오쩌둥이 여러 목소리로 야기된 당내 혼란을 당권을 완전장악하면서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다양한 의견이 혼재하기보다는 하나의 의견으로 통일하는 것이 곧 질서이고 성공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마오가 모델로 삼았던 소련에서조차 수많은 반대파를 처형하던 스탈린 독재가 끝난지 5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라서 이런 개념은 거의 없었다.

언론의 자유를 절대시하는 관점에서 마오쩌둥의 이런 언론과 비판자 탄압은 비판받을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아시아에 이런 체제가 일반적이었다. 소위 "자유중국"이라고 불리던 대만에서조차 마오쩌둥의 라이벌이었던 장제스는 자유라는 말이 무색하게 중국이랑 별반 나을 바 없는 계엄령하의 1당독재를 하면서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했고, 소위 민주국가인 미국에서 박사까지 딴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헌법에 명시한 대한민국에서 반대파를 학살하고 사법살인을 저지르는 독재를 펴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강도는 덜하지만 "매카시즘" 선풍으로 로젠버그 부부 사건 등을 포함하여 언론과 정치적 자유가 탄압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요약하면 마오쩌둥의 언론탄압은 그의 한계이고 현대에 와서는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당시 역사적 맥락은 고려해야 한다. 특히 나무위키나 디시인사이드의 극우 장제스옹호자들이 이를 들어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이중기준은 내로남불에 다름아니다.

대약진운동[편집 | 원본 편집]

건국후 몇년간 한국전쟁으로 국가의 자원이 상당부분 전용되었지만, 여러 사회개혁 조치들로 인해서 중국은 견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0년대 말이되자 60대에 접어든 마오쩌둥은 자신의 생전에 자신이 꿈꾸던 사회주의 낙원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조급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경제를 대폭 성장시키기 위한 여러 실험적 정책을 꺼내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대약진운동이었다. 이 계획의 골자는 중국의 경제를 도약시켜 10년안에 미국과 영국 같은 선진국 규모의 경제를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계획의 골자는 식량증산과 철강증산이었는데, 이를 위해 여러 검증되지 않은 정책이 실시되었다.

식량증산을 위해서 먼저 농업집단화를 실시했고, 일종의 마을 공동체이자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1950년대 토지개혁으로 나누어주었던 토지를 다시 집단화하여 공동경작하게 했다. 하지만 농민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없던 이런 집단화는 1930년대의 소련에서처럼 농업생산성을 급감시켰다. 비판자들은 마오쩌둥이 농민의 역할을 중시했지만, 농민의 속성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없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사실 마오쩌둥은 농촌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농민출신이라기보다는 지식인 계급 출신이라고 보는게 더 맞고, 자기소유물에 대한 애착이 강한 농민들의 소부르주아성을 간과한 것은 큰 실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간첩혐의를 받고 중국으로 추방된 전직 MIT교수를 지낸 첸쉐썬 박사의 조언을 듣고, 논에 모를 빽빽히 심기가 장려되었으나, 이렇게 심은 모는 잘 자라지 못하고 곡식을 맺지 못했다. 이는 미국에서도 일류학자라는 평가를 받은 첸쉐썬의 말을 맹종해서 빚어진 일이지만, 첸쉐썬은 농학박사가 아니라 공학박사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철강증산을 위해서 전근대적인 재래식 고로에서 쇠를 녹이는 방법이 권장되었으나, 여기에 관료주의가 겹쳐서 생산량 증가를 위해 여러 생활용품이나 농기구의 철까지 녹여지게 되었다. 문제는 마오쩌둥의 의도와는 달리 이렇게 재래적으로 만들어진 철은 전혀 산업의 재료로는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를 위한 연료로 쓰여지기 위해 삼림이 남벌되었는데, 이때문에 중국 대륙 곳곳은 민둥산이 되었고, 홍수나 가뭄에 취약하게 되어서 안그래도 안좋은 농업에 더 결정타를 가하게 되었다.

동시에 실시된 제사해운동 (쥐, 모기, 파리, 참새 잡기운동)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는 인민위생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고 상당한 성과도 있었다. 당시 중국 농촌에서는 위생관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여름철만 되면 전염병이 창궐했으나, 이렇게 해충잡기 및 화장실짓기 양치질하기 운동 등과 같은 여러 위생조치들은 중국의 평균수명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문제는 참새였다. 이 제사해운동중에 특히 참새잡기 운동은 원래는 가을에 벼를 훔쳐먹는 참새를 박멸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으나, 이때문에 병충해가 들끓게 되어 농업 생산을 더 악화시켰다.

이때문에 1958-59년에 중국에는 대기근이 발생했으며 약 2000-4000만정도가 아사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 대목은 아래 설명할 문화대혁명에서의 학살자로 왜곡되어 둔갑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다른 성격이다)이는 명백한 마오쩌둥의 과오 및 마오쩌둥에게 상황악화를 보고하지 않은 관료주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렇게 대규모의 아사자가 많이 나온 주원인은 1950년대에 중국에 평화가 깃들고 다산정책이 장려되면서 1년에 1억씩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증가된 인구의 상당수가 이런 기아에 사망한 것이다. 다만 아예 손놓고 있었던 장제스 시기의 기아와는 달리 이 시기에는 공산당의 행정력이 작동하고 있어서, 배급제 실시등의 조치로 더 큰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이런 대약진운동은 중국현대사에 무지한 유저가 많은 디시에서는 "저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식으로 희화화되고 있으며, 디쾨터나 극우 역덕들은 이를 대학살로 왜곡하고 있다. 마치 이들은 마오쩌둥및 공산당이 의도해서 학살을 벌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런 참극에 마오쩌둥과 공산당 관료조직의 책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정책실패와 집단학살을 동렬로 놓는 것은 악의적인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원래 대약진운동의 의도가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켜 10년안에 선진국이 되겠다"는 것이었지, 히틀러나 이승만처럼 "반항하는 인민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겠다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생긴 정책적 실책이었다. 또한 이런 기근은 중국 역사에 주기적으로 반복되었으며, 디쾨터가 옹호하는 장제스 치하에서 벌어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1942년에 국민당 지배시에서도 규모는 적지만, 수백만이 굶어죽은 허난성 대기근 [2] 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국민당측은 수수방관했고, 오히려 침략자인 일본군이 기아대책을 펴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건 바로 디쾨터등이 옹호하는 장제스 치하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이중잣대를 가진 디쾨터나 한국의 어느 장제스 빠 밀리터리 덕후를 비롯한 극우역덕들은 이를 "장제스의 학살"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당시 부총리 및 국방부장을 역임하고 있던 펑더화이는 이런 참상을 목격하고 마오쩌둥에게 항의서한을 제출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 펑더화이를 주요간부회의에서 비판하고 해임했다. 이 때문에 국공내전의 승리의 주역이자 한국전쟁에서 활약을 펼친 펑더화이는 실각했고, 사망 때까지 야인으로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정책실패 및 기아의 책임은 분명히 마오쩌둥의 책임이었으며, 마오도 결국 이런 참극에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을 사임했다. 마오를 대신해 류사오치가 국가주석 덩샤오핑이 당서기로 떠오르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행정에서 손을 떼고 군(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당조직(당 주석)만을 맡게 되었다.

문화대혁명[편집 | 원본 편집]

해서파관 사건[편집 | 원본 편집]

린뱌오[편집 | 원본 편집]

사인방[편집 | 원본 편집]

사상[편집 | 원본 편집]

마오쩌둥의 사상의 특징은 기존 마르크스주의변증법적 유물론관념론적인 요소가 곁들어져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역시, 물질적 구조의 변화와 동시에, 구시대적 의식과 관념의 변화가 이뤄져야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의 특징과 서로 결합하고 일정한 민족적 형식을 거쳐야 비로소 쓰임새 있어지며, 결코 주관적, 공식적으로 응용할 수 없다며, 기존의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투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을 교조적으로 고집하는 이론에서, 해당 사회의 현실과 결합한, 형식에 맞는 실천을 주장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이러한 교조주의를 "똥보다도 못하다"고 말하기까지했다. 하지만, 이러한 마오주의를 교조적으로 따르는 사람들도 여럿 나타났기도..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의 혁명노선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넓혀가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농민 혁명으로 시작해 도시로 확장하는 방식을 주장했으며, 게릴라 전술을 상당히 중시했다. 이러한 이론은 전근대적인 3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레닌이나 스탈린과는 달리 마오쩌둥은 중국을 반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적이고 강력한 나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사회관계를 변혁시킨 혁명가일 뿐만 아니라 쑨중산(孫文)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중국인을 존중하게 만든 위대한 반제국주의 혁명을 실현시킨 민족 영웅이기도 하다. 중국인들이 결코 ‘위대한 조타수’를 잊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알렉산더 판초프 (저), 마오쩌둥 평전 p.820

중국에서는 전쟁 이후 공산주의자들과 서양의 지배를 받는 국민당 사이에 패권 경쟁이 시작되었다. 토지 황폐화와 자본 손실로 국가 산업은 멈춰있었다. 물가는 1937년에 비해 2000배 이상 올랐고, 일본이 항복한 지 한 달도 안 돼 외환시장에서의 중국 통화 가치는 70% 이상 하락했다. 인플레이션이 중국 중산층을 휩쓸었다. 지식인들은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 시달리던 민족주의자들은 국민의 요구에 화답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토지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좋든 싫든 중국의 유일한 희망은 마오쩌둥이었다. 민중의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 일본 제국 패망사 p.1320

좌우를 불문하고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마오쩌둥의 업적은 세 가지이다. 첫번째로 제국주의 국가에 짓밟히지 않는 강력하고 통일된 중국을 만들었고, 두번째로 토지개혁 및 봉건제 철폐, 세번째로 여성해방이었다. 위에 인용된 판초프는 마오쩌둥에 대해 전혀 우호적인 역사가가 아니지만, 그 조차도 마오쩌둥이 만든 신중국은 제국주의 국가가 더이상 침탈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장제스 시기까지만 해도 중국은 홍콩과 비슷한 여러 조계지를 제국주의 국가에 조차하고 있었고, 제국주의 국가의 자본들이 활개를 치며 중국을 착취하고 있었다. 중국 자체의 매판자본들은 장제스 및 제국주의 국가와 손잡고 중국의 잇권을 탈취했다. 마오쩌둥의 신중국은 이런 제국주의 세력과 매판자본을 모조리 중국내에서 척결했다. 뿐만 아니라 장제스는 본인의 독재적 권력과는 별개로 지방에서 할거하는 군벌과 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도저히 통일된 국가라고 보기 힘들었지만, 마오쩌둥의 신중국은 지방 할거 세력을 모두 척결하여 단일한 중국을 물려주었다

또한 토지개혁으로 수천년간 농촌을 지배하던 지주세력을 척결했으며, 봉건적 관계도 타파했다. 지주계급 철폐로 개혁개방 당시 산업자본의 형성에 유리했으며, 이는 중국의 고성장을 이끌고 있다. 지주계급이 고스란이 남아있는 남미와 인도가 경제개발에 어려움을 겪거나 속도가 느린 것을 보면 중국의 고성장에는 이런 지주계급 해체는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유교적 남녀관을 타파하여 남녀평등을 입법화했고, 여성의 사회진출도 보장했다. 그리하여 축첩제나 일부다처제는 폐지되었으며, 남녀공학이 일반화되었고, 여성의 사회진출의 장애도 없어졌다.

부정적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중국 집권세력조차도 비판하는 마오쩌둥의 과오는 여럿이다. 먼저 대약진운동으로 실험적 정책을 검증없이 실시하다 수천만명의 아사자를 냈다. 이는 마오쩌둥의 명백한 실책이다. 그가 적극적으로 주장해 실시된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문화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원래 취지는 "사회주의에 맞는 새시대의 문화와 이상적인 신인간형의 창조"를 위함이었으나 단순 반달-폭력행위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마오쩌둥에 대한 일부 비판은 타당하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일부 좌파 논객들조차 중공정권의 소수민족의 억압을 과오로 들기도 하지만, 소수민족 억압은 중국뿐만 아니라 모든 다민족 국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미국같이 아예 원주민을 말살해서 소수로 전락시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다민족 국가는 소수민족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인도나 인도네시아 필리핀 같은 경우는 아직도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사회주의 정권은 더더욱 예외가 아니며, 동남아시아의 베트남이나 라오스 또한 몽족을 비롯한 산악부족들과의 갈등이 근현대에도 존재했다. 이런 소수민족들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편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나라 또한 국가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지원해주며 어떤부분에선 자신들 사회에 동화시키는 작업을 거쳤다. 예를 들면 소수민족이 사는 지역에 학교를 지어주고 교육 사업을 추진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 원인에는 프랑스와 미제국주의자들의 분할통치라는 제국주의적 방식이 그런 갈등을 베트남과 라오스에서 부추기도록 한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말이다. 거기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이를 잘못 다루었다가 국가는 분열하고 수십만명이 사망하는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중공정권이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에 대해서는 매우 탄압적이지만, 그밖의 정책에서는 이전의 중국정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전향적이다. 역밀덕들이 "민주적인 지도자"라고 잘못 알고 있는 장제스 정권까지만 하더라도 소수민족을 아예 인정하지 않았고, 소수민족 자치도 거의 없었다. 마오쩌둥이 집권하자 소수민족 자치제도가 만들어졌고 자기 언어를 가르치는 민족학교가 만들어졌다. 사회주의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인 풍습을 유지하고 있던 몇몇 소수민족의 지배계급에 대한 탄압이 있긴 했지만 (예를 들어 티베트의 경우 노예제가 있었고, 로로족도 천민계급이 있었지만 이는 사회주의와 맞지 않아 모두 해체되었다), 소수민족 전체를 탄압적으로 놓은 바는 없고, 극우 밀역덕이 주장하듯이 "강제 동화책"을 펼친 경우는 전혀 없다. 예를 들어 현재 중국조선족의 상당수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유도 중국 중앙정권이 강제동화책을 쓰지 않고 민족정체성 보호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극우 밀역덕들은 위구르족에 대한 인권탄압이나 감시를 들어 중국 정부를 비판하곤 하지만, 그들이 숭배하는 장제스는 아예 소수민족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특히 본인들이 숭배하는 미국인이 북미원주민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본다면, 또는 그들이 찬양하는 이스라일인들이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본다면 이것은 내로남불에 불과하다.

각주[편집 | 원본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