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위키 사용자 여러분! 진보위키 2.0 프로젝트를 통한 진보위키의 구조적 개편을 알립니다! 더 알아보기..
  • 이제 진보위키 계정에 이메일이 인증되지 않으면 문서 편집이 불가능합니다.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을 인증해주세요.

박정희

진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Killer-820017 1280.jpg 이 문서는 범죄자에 대한 설명을 다룹니다.
반사회적인 끔찍한 범죄자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다룹니다.
Harmfulpic1.jpg 이 문서는 유해한 대상에 대한 설명을 다룹니다.
인체나 정신에 유해한 대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합니다.
Redskullpic1.png 이 문서는 살인마에 대한 설명을 다룹니다.
살인 사건 범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합니다.
Beom1.PNG 이 문서는 범죄에 대한 설명을 다룹니다.
범죄행위 또는 범죄사건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다룹니다.
Jackpic1.jpg 이 문서는 타락한 대상을 다룹니다.
타락한 대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합니다.
Faspic2.jpg 이 문서는 파시스트에 대한 설명을 다룹니다.
파시스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합니다.
Garbpic1.JPG 이 문서는 쓰레기에 대한 설명을 다룹니다.
지구상의 다양한 쓰레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다룹니다.
박정희
이름 박정희
히라가나 たかき まさお
다른이름 다카키 마사오
출생일 1917년 11월 14일
사망일 1979년 10월 26일
직업 정치인, 군인
성향 친일
소속 민주공화당
비고 친일파, 간첩, 내란범, 독재자, 살인마, 성범죄자
"일본의 군인이 천황절대주의자 하는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2·26 쿠데타를 일으킨 일본의 청년 장교들에 대해서[1]

박정희 또는 다카키 마사오는 친일파, 간첩, 내란범, 독재자, 살인마, 성범죄자이다.

일제시대 때 나이가 많아서 만주육사에 입학할 수 없게 되자 혈서를 써서 기어이 들어갔으며 일본 군인으로 활약하다가(친일파)

해방 이후에는 군대 내 남조선로동당 간첩으로 활약하다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같은 친일파들의 구명운동과 동지들을 팔아넘겨서 살아남았고(간첩)

이후 5.16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뒤엎고 정권을 잡았으며(내란범)

이후 독재정치를 펼치다가 10월 유신으로 종신집권을 꿈꿨으며(독재자)

김형욱을 해외에서 암살하고, 장준하를 암살하고, 김대중을 납치 살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김영삼에게 초산을 뿌려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8명을 죽이는 등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살인마).

또한 권력을 악용하여 수많은 젊은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다.(성범죄자)

생애

박정희는 1917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났다. 1926년 구미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한 박정희는 3학년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을 정도로 공부는 꽤 잘했다. 박정희는 독서도 많이 즐겼는데 본인 회고에 따르면 군인을 동경하여 나폴레옹과 이순신 평전을 감명 깊게 읽었다 한다. 1932년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고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1940년 박정희는 만주육군군관학교에 입교했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그 과정을 거쳐 1944년 7울 만주국군에 배속되었다. 1944년 12월에는 육군 소위가 됐다. 박정희가 배속된 부대는 주로 동만주 지역 일대였고 그 부대의 주 임무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토벌이었다. 당시 박정희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과묵한 성격이었던 박정희는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면서 적극 나섰다고 한다. 설사 이 증언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박정희는 만주군에 있으면서 팔로군을 토벌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를 두고 박정희는 독립군을 토벌한 적이 없고 중공의 앞잡이 팔로군을 토벌했다 하는 정신나간 사람들이 있는데 모택동이 이끄는 팔로군 안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았고 중국 팔로군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군대였다. 즉 박정희가 토벌한게 독립군이었든 팔로군이었든 간에 박정희의 만주국군 복무는 명백한 친일행위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다. 박정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까지 만주군에 복무했다. 박정희는 잠시 귀국하기 위해 광복군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광복군에 있던 시점은 일제가 패망한 후이고 그가 광복군에 잠시 합류했던 이유는 단순히 귀국하기 위함이었다. 즉 박정희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소리는 말 그대로 뇌피셜이다. 해방 이후 박정희는 잠시 남로당에도 관여했지만 1948년 여순사건 연루 혐의를 받은 박정희는 300명의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백선엽에게 제공한 뒤 자신만 살아남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한국전쟁이라는 기회를 틈타 어느 정도 출세했고 1950년에는 육영수와 결혼했다. 1952년에는 닭보다 멍청한 딸 박근혜를 낳기도 했다. 1953년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은 독재의 길을 걸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권은 4.19 민중혁명으로 몰락했다. 이승만 독재가 끝난 뒤 들어선 장면정부는 그 나름의 개혁을 시도하려 했지만 1961년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로 끝이 났다. 5.16 쿠데타로 정권은 잡은 박정희는 혁명공약에서 “본인들의 임무를 다 마치면 군으로 복귀할 것이다”라고 얘기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63년 박정희는 군복을 벗은 뒤 대선에 출마하여 후보 윤보선을 꺽은 뒤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파시즘에 가까운 독재국가로 만들었다. 특히 1968년 김신조 사건, 푸에블루호 사건 그리고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등이 일어나자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더욱더 강력한 반공국가로 만들었다. 대한민국을 반공 밖에만 모르는 국가로 만든 박정희는 완벽한 독재의 길을 걸었다. 물론 그가 그러기 까지는 박정희 시기 경제성장도 한몫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태일과 같은 노동자들의 인권은 유보됐다. 1971년 박정희는 또다시 독재의 길을 걸었고 엄청난 부정선거를 통해서 후보 김대중을 이긴 뒤 1972년에는 10월 유신까지 선포했다. 1974년 부인 육영수가 죽은 뒤 박정희는 궁중가에서 수많은 여성들과 놀며 왕처럼 행동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자 박정희는 긴급조치9호를 발동하여 수많은 민주주의적인 권리를 탄압했다. 1978년 박정희는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대한민국 제5,6,7,8,9대까지 대통령을 한 것이다. 1979년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반 독재 집회가 열렸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보고 매우 충격을 받았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자신의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맞고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김재규의 총탄에 맞기 전 박정희의 부하 차지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캄보디아에서 3백만이 죽었습니다. 신민당이든 학생이든 간에 우리도 50만에서 100만쯤 죽이면 조용해 질 것입니다. 아예 탱크로 밀어버리죠.” 참으로 소름끼치는 발언이다. 그게 실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말 말도안되는 소리다. 무튼 박정희는 자신의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고 죽었다. 이로써 박정희의 독재는 막을 내렸다.

불명예스러운 최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 : 그래서 이것을 제가 발표하면 서울시민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여기에는 수십 명의 일류 연예인들이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명단을 밝히면 시끄럽고 그와 같은 진행과정을 알게 되면 세상이 깜짝 놀랄 일들이 많습니다. 평균 한 달에 각하가 열 번씩 나오는데 이것을···

1979년 박정희는 부마사태가 벌어졌을 때 궁정동 안가에서 대행사(술자리)와 소행사(잠자리)를 치르기 위해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에 비유할 수 있는 연예인 2명(심수봉, 신재순)을 불러다가 술을 마시다가 10.26 민주회복 국민혁명이 일어나서 차지철 등과 함께 총을 맞고 추하게 죽었다.

이것은 지금으로 비교하면, 이명박이 잘나가는 원더걸스나 소녀시대 같은 걸그룹 맴버 2명을 불러다가 술자리와 잠자리를 하는 상황을 상상하면 된다. 여기서 박정희가 미화된 이미지와 다르게 얼마나 타락한 인물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계속된 친일

박정희는 1961년 쿠데타 직후부터 군사정권의 수반으로서 한일회담을 시작했다. 또한 박정희는 일제 군관학교 시절 은사와 군대 상관들의 지원과 조언에 크게 의존했다.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는 도쿄에서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유당 정권처럼 많은 청구권 자금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 배상 등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정상회담에 이어 일본 정계 거물들이 한 자리에 모인 도쿄 아카사카의 요정(料亭) '가와사키' 오찬에서는 일본군 출신 박정희의 더욱 굴욕적인 태도가 드러났다.

박정희는 다다미 위에 양손을 짚고 유창한 일본말로 예의 바르게 일본식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숙한 소생을 잘 지도해 주십시오."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 자리에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재학 때 교장이던 나구모 신이치로 예비역 중장도 동석했다. 나구모는 박정희가 해마다 인삼을 보내주면서 예우해온 일본군 상관이자 은사였다.[2]

박정희는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앞에서 이런 경악스러운 말로 자신이 골수 친일파임을 증명했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3]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품고 그분들을 모범으로 삼으려 합니다."[4]

그래서 훗날 메이지 유신에서 이름을 차용한 10월 유신을 일으킨다.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는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 축하사절단의 일행으로 한국에 왔을 때 이런 말을 남긴다.

"아들의 성공을 보는 아버지의 흐뭇함을 느꼈다."[5]

일본 돈으로 세운 박정희 정부

쿠데타 이후, 검은 정치자금이 일본 쪽에서 대량으로 흘러들어왔다.

공화당 창당자금을 만들기 위한 4대 의혹사건 중 파친고와 새나라자동차 수입허가 비리가 일본 쪽과의 검은 거래였다.

미국 중앙정보국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일본 기업들로부터 공화당 총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았다.[6]

코스프레

"계엄선포(1971년 10월 17일) 한 달 전쯤인가.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류순열, <벚꽃의 비밀> 39쪽에서 재인용)

[7]

사병 급여 갈취

원래 이승만 정권 당시 이등중사 월급은 120환이며 준장의 월급은 1200환이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병 급여를 동결시키고 간부 급여만 인상시켰다.

그 결과 2000년에는 병장 월급이 2만원에 불과하는 사태가 초래했다.

또한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받은 돈을 횡령하여[8] 스위스 은행에 넣고 최태민, 최순실, 이후락의 아들 이모씨 등의 명의로 비자금을 조성했다.

나쁜놈도 이런 나쁜놈이 없다.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핏값을 횡령한 것이다.

가정폭력

박정희는 둘째 부인 이현란에게 가정폭력을 휘둘렀다.[9]

모델이자 배우였던 정인숙이 교통사고로 위장한 사고로 죽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정인숙이 관계한 권력자 26명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박정희는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에 부인이었던 육영수와 박정희 사이에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박정희는 화가 나서 육영수의 얼굴에 재떨이를 던졌다. 육영수의 눈자위에 푸른 멍이 든 것이 외부에서 온 방문객과 기자에게 목격되었다.[10]

학살 준비

박정희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대량 학살을 준비했다.

미국이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을 때 박정희와 김종필은 엄청난 인명 살상을 준비했다고 한다. 쿠데타 주역의 하나인 유원식의 증언이다. “박정희 부의장실에 들어갔을 때 마침 김종필이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박 부의장에게 ‘어젯밤에 모두 잡아넣었습니다. 약 2만8천명가량 되는데 수송에 필요한 열차도 준비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들을 거제도로 데려가서 한데 모아놓고 기관총으로 한꺼번에 사살해버리는 것뿐입니다.”(유원식,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

유원식이 그 후에 알아보니 김종필씨가 당시 정보과장으로 있던 방아무개 대령에게 극비 지시해 전국에서 요시찰인 명부에 실려 있는 인사들을 모조리 검거했는데, 그의 아침 보고는 사후 대책까지 마련했다는 일종의 결과 보고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쿠데타 승인을 받으려는 목적이었다. 이 음모는 실행되지 않았으나 계획 자체가 용납하기 어렵다. 진상규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11]

부정축재

박정희는 극단적으로 부패한 인물이었다.

경우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 아무한테서나 정치자금을 흡수하다 보니, 박정희 자신이 '떼부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돈들은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 탁자 뒤의 금고 안에 보관되었다고 한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12]

"박정희 사후에 조순제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은 박정희가 남긴 돈을 최태민 일가 쪽으로 옮기는 데 관여한 것이다. 금덩어리도 나왔고 달러와 채권 뭉치도 나왔다. 외국 은행의 비밀계좌에서도 돈이 나왔다."

[13]

또 박정희의 측근들도 떼부자가 됐다. "1970년경에는 이후락·김성곤·김형욱이 각각 축적한 개인 재산이 1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 청와대 고위급 관리가 말했다"고 보고서는 증언한다.

[14]

그러면서 "일본과의 협정이 체결된 1965년 6월 직후, 민주공화당 자금을 조달하고 정부 핵심 관리들을 살찌울 지속 가능한 돈세탁 시스템이 수립되었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한일협정 체결 뒤의 '후속 조치'로 돈세탁 시스템부터 구축했다는 것이다.

[15]

1978년 미 하원 외교위원회의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박정희 정권이 독일 차관과 베트남 참전 지원금을 불법 은닉한 스위스 비밀계좌의 계좌번호가 적시돼 있다. 미국 의회 공식 문서로 드러난것이다.[16][17]

기타

함께보기

진보위키에 작성된 박정희 관련 문서

각주

  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23329
  2. 첫문단부터 여기까지의 출처 - 김재홍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326~237 페이지
  3. 박정희가 말한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은 바로 정한론을 펼친 사이고 다카모리,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불린 이토 히로부미 같은 인물들이었다.
  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172213085
  5.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5374
  6. 김재홍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326~327 페이지
  7.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769296
  8. https://news.v.daum.net/v/20190330144417836?rcmd=rn&f=m
  9. https://www.google.co.kr/search?tbm=bks&hl=ko&q=%EC%9D%B4+%EB%95%8C+%EB%B0%95%EC%A0%95%ED%9D%AC%EB%8A%94+%EC%9D%B4%ED%98%84%EB%9E%80%EC%97%90%EA%B2%8C+%EA%B0%80%EC%A0%95%ED%8F%AD%EB%A0%A5%EA%B9%8C%EC%A7%80+%ED%9C%98%EB%91%98%EB%A0%80%EB%8B%A4%EB%8A%94+%EC%A6%9D%EC%96%B8%EC%9D%B4+%EC%9E%88%EB%8B%A4#hl=ko&tbm=bks&q=%EB%B0%95%EC%A0%95%ED%9D%AC+%EC%9D%B4%ED%98%84%EB%9E%80+%EA%B0%80%EC%A0%95%ED%8F%AD%EB%A0%A5
  10. 김재홍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33 페이지
  11. http://m.hani.co.kr/arti/opinion/because/850566.html?_fr=tw#cb#csidxc0d2bc151e936d0bda9ea2852163555
  12.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482744#cb
  13.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482744#cb
  14.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482744#cb
  15.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482744#cb
  16. https://news.v.daum.net/v/20181212145238381?f=m
  17. https://news.v.daum.net/v/20181212181101319?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