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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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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964~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웠을 때, 그것은 조직화된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조직화된 인간사이의 싸움이었으며 결국 인간이 승리했다.

미국민중사 2 p.207

베트남 전쟁은 1960년대 미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침략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융단폭격 및 대량의 고엽제를 살포하여 수많은 인명피해를 만들었다. 그러나 호치민의 지휘아래 단결한 베트남인들은 미국과 남베트남 우익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고, 1975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 전쟁은 북베트남의 침략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며, 제네바 협약을 먼저 위반한 것도 미국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은 미제국의 침략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스페인 내전과 함께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전쟁으로 불린다. # 이지역에서 연고와 명분이 전혀 없는 미국이 괴뢰정권을 지원하여 북베트남을 공격했기 때문에 전세계인들의 반발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엄청난 비판이 있었다. 현재 베트남 전쟁의 미국 개입을 긍정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쪽은 남베트남 출신 망명객이나 한미 극우세력 정도이다.

배경[편집]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난 뒤, 베트남은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해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호치민은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은 선포한다. 그러나 연합국은 베트남의 독립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고, 북위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에는 중국군이 남에는 영국군이 입성한다. 중국군의 경우 1946년 국공내전을 전후로 하여 철수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당시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는 프랑스를 끌어들였고, 영국군 철수 이후의 프랑스가 들어오자 이는 베트남과의 마찰로 이어졌다. 1946년에 호치민은 퐁텐블로에서 프랑스측과 회담을 가졌지만, 협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국 베트남과 프랑스의 갈등은 격해졌고, 이는 결국 프랑스가 하이퐁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게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미국은 도미노 이론에 심취하여 프랑스에게 식민지 유지하랍시고, 전비의 80%를 지원했지만, 베트남 민중으로 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던 프랑스는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1] 오히려 1950년을 기점으로 호치민과 공산당이 지휘하는 베트민 세력들이 프랑스군을 여러곳에서 격퇴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결국 프랑스는 1954년 5월 7일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대패하면서, 전쟁에서 패배한다. 56일간의 포위 끝에 베트민은 프랑스군 2300명을 사살하고 1만 명 이상을 포로로 잡는데 성공함으로써 베트남은 영광스러운 승리와 독립을 쟁취했다.

경과[편집]

베트남의 분단[편집]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분명히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을 실시해야 했지만,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미국은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이라는 베트남판 이승만을 앞세워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자신들의 친인척들을 남베트남 내각에 대거 편입시키는가 하면, 토지를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할당했고, 대다수의 민중이 믿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석가탄신일을 없애는 것은 물론 지엠 정권은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뿐만 아니라 응오딘지엠 정권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대불항전을 전개하던 베트민 잔존세력들까지 탄압했다.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뉴는 남베트남에서 비밀경찰을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한다. 이 과정에서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응오딘지엠 정권의 억압적인 정책이 계속되자 남베트남에서는 자체적으로 반응오딘지엠 조직이 창설되는 데, 그게 바로 베트콩이다.

그런 과정에서 북베트남은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60만 명의 가톨릭 교도를 포함한 80만 명이 월남하는 사태가 있었는데,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부는 토지개혁으로 의도치 않게 가톨릭을 탄압하기도 했지만, 북베트남에 남아있던 가톨릭 90만 명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토지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있었지만, 호치민 주석의 철저한 자아비판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조치 및 지도부의 공개적인 사과행위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토지개혁은 많은 민중에게 토지를 분배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권이 일방적으로 분단의 길을 걷자 호치민과 북베트남 또한 1959년 부터는 남부 통일을 공식적인 목표로 세우게 된다.

미군의 남베트남 개입[편집]

1.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 민족민주연합정부의 수립 2.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 3.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경제의 건설 4. 소작료 경감과 점진적 토지개혁 5. 민족문화의 건설 6. 인민의 군대 건설 7. 남녀동권, 민족평등, 재베트남 외인과 재외베트남인의 권리보장 8. 평화적 중립적 외교정책 9. 남북 베트남의 관계정상화와 평화적 통일 10. 세계평화 옹호

전환시대의 논리 p.415

위에 상술된 강령은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투쟁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라는 공식 명칭을 가진 베트콩은 1960년 12월 캄보디아 국경지대에서 자체적으로 창설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응오딘지엠의 남베트남 정권은 그저 프랑스에 협력하던 관료들과 부패세력이 다스리는 나라였을 뿐이었다. 그들은 남베트남 정권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고, 민심은 남베트남 정부를 떠났다. 응오딘지엠이라는 베트남판 이승만을 앞세웠던, 미국은 도미노 이론에 따라 베트남 사태를 주시했고,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군사 고문단들을 파견한다. 그리고 그 군사 고문단의 숫자는 1960년 대 초 미국의 존F케네디 정권 때 상당한 규모로 커진다. 케네디 정부는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 형식으로 특수부대를 보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했고,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는 몬타냐드(Montagnard)라고 불리는 산악 소수민족들을 포섭하여 베트콩에 맞서도록 했다.[2] 또한 라오스에서는 대중적 지지를 받던 파테트 라오에 맞서 소수민족 몽족(Hmong)을 포섭하여 공산주의에 저항하도록 했다.[3] 미국은 APC 장갑차량과 UH-1 헬기와 수송헬기 등을 남베트남에 지원했다. 케네디 집권 말기인 1963년에는 몇백명이었던 미군사고문단의 숫자가 16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불과 2년도 안되는 사이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막장 짓을 일삼았다. 대표적인 예로 1963년 6월 11일 수도 사이공에서 있었던 고승 틱광둑의 소신공양이 있다. 불교도 탄압에 맞서 틱광둑 스님이 소신공양을 하자 응오딘지엠의 재주인 마담 누가 한 말은 중놈이 한거라곤 바베큐가 된 것 밖에 없어라는 망언이었다. 뒤어어 더 많은 불교 승려들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반대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분신자살하기 시작했다. 응오딘지엠의 경찰은 불교 사원을 습격, 30명의 승려에게 부상을 입히고 1400명을 체포했으며 사원들 폐쇄시켰다. 사이공에서도 학생괴 승려를 비롯한 민중들의 시위가 잇따랐는데,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9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옛 베트남의 수도였덧 후에에서는 1만 명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4]

응오딘지엠 치하의 남베트남 정권 군대는 전투에서도 베트콩에게 상대가 안됐다. 1963년 사이공 근처의 마을에서 일어났던 압박 전투(Battle of Ap Bac)에서 남베트남군 1500명과 베트콩 300명이 교전을 했었는데, 남베트남군이 베트콩의 전사자 보다 4배나 많았고, 남베트남군을 지원한 미군 헬기 5대가 격추당했었다. 심지어 수송장갑차량인 APC 8대와 헬기 15대를 투입했는데도 말이다. 쉽게 말해 그런 최신식 무기가 있었음에도 남베트남군은 허접한 모습을 보엿다는 얘기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1963년 11월 응오딘지엠 정권을 전복시켰다. 두옹반민 장군이 지휘하는 쿠데타 세력들이 정권을 잡기가 무섭게 처음시작된 쿠데타는 또 다른 쿠데타를 지속적으로 발생시켰다. 그런 내부 쿠데타는 1965년 베트남의 박정희라 할 수 있는 응우옌 반 티에우가 정권을 잡으면서 마무리 된다. 물론 정권을 잡은 응우옌 반 티에우 정권도 부패하기는 매한가지였다.[5] 당연히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던 미국은 남베트남의 자체적인 붕괴와 도미노 이론을 걱정하였기에 남베트남 문제에 개입했고, 1964년에는 북베트남 영해에서 그들을 도발하는 치졸한 짓까지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통킹만 사건이다.

베트남 전쟁의 시작[편집]

1964년 남베트남의 내부 총질을 보고 있던 미국은 결국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에게 선전포고한다. 당시에는 통킹만 사건이 북베트남의 선제 공격이라 알려졌지만, 나중에 조작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진다. 거기다 통킹만 사건이 있기 몇일 전인 7월 31일엔 남베트남 무장 보트들이 혼메(Hon Me)와 혼니우(Hon Nieu)라는 2개의 조그만 섬을 공격했었다.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1964년 10월 사이공 근처에 있는 비엔호아 공군기지가 공격 받았는데, 헬기 및 항공기 수십대가 지상에서 연쇄적으로 파괴되었다. 이중에는 B-57 폭격기 5대도 있었다. 1964년 12월엔 수도 사이공으로 부터 30km 정도 떨어진 빈 지아에서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전투에서 승리했었다. 1965년 2월 7일 베트콩은 중부 고원 지대에 있는 미국 육군의 플레이쿠 기지를 습격해 미군 8명이 전사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미군 헬기 7대를 파괴했다. 그러자 미국의 린든 B 존슨은 1965년 2월 롤링썬더 작전을 개시하여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3월에는 남베트남의 휴양 도시인 다낭에 대략 3500명 정도 되는 규모의 미해병대를 파병한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과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태국도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은 전투에서 무능력한 모습만 보였고, 베트콩은 보기 좋게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65년 5월 말에는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 며칠 동안의 전투 끝에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완전히 괴멸시키기도 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에 정권을 잡은 이들 또한 부정부패하고 무능했다. 미국의 동맹국이던 남베트남군은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능했다. 미 국방부 자료에 의하면, 1966년 한 해에 12만 4000명의 남베트남 병사들이 탈영했다. 이는 남베트남 지상군의 21%에 해당되는 숫자였다.[6] 1967년 미국 군부는 남베트남 정규군의 80%가 비효율적이라고 판정했다. 그들의 작전은 ‘찾으면 피하라’로 알려져 불신과 혹평을 받았다.이에 미국은 더 많은 지상 병력을 파견했고, 고엽제를 살포하며 인근 마을과 숲을 무차별 폭격했다.

다낭항에 미해병대가 상륙한 이후 미국은 남베트남 전역에 정규군대를 파병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제1 기병사단과 같이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최신식 기동성을 겸비한 군대 또한 남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었다. 미군 제1 기병사단은 중부고원 지대 자라이 성에서 작전을 펼치다가 북베트남 정규군과 베트콩하고 교전을 벌이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이아드랑 전투였다. 이아드랑 전투에서 대규모의 헬기와 항공기 공중지원을 받았던 미군은 300명의 전사자가 속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1700명 이상을 사살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1965년 11월 미국은 이아드랑 전투에서 대규모의 헬기부대를 동원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만, 그렇다 해서 전쟁 자체를 승리로 이끌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아드랑 전투를 시작으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나는 전투에서 사실상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정규전이 아닌 비정규전이었다. 즉 제2차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과는 달리 전선이라는게 없었다. 물론 막강한 화력을 소유한 미국이었기에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크게 착각했다. 총 사령관이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임기기간동안 300여개의 군사작전을 펼쳤다. 작전의 이름도 가지각색이었는데, 광(Starlight), 은검(Silver Bayonet), 분쇄-흰 날개(Masher-White Wing), 쌍독수리(Double Eagle), 용화(Dragon Fire), 맥아더, 셰넌도어(Shenandoah) 새러토가(Saratoga), 그리고 나폴레옹이라는 이름까지 동원되었다.

전쟁이 격화 될수록 남베트남 주둔 미군의 숫자도 늘었는데, 1964년에 1만 7000명이었던 미군 병력은 1965년에는 16만 명을 넘어섰고, 1966년에는 45만 명, 1967년에는 49만 7천 명, 그리고 1968년에는 거의 54만 9000 명까지 증가했다.[7] 또한 미국의 그린 베레와 MAC-V 그리고 MIKE 포스 같은 특수부대와 그 밑에서 활동하는 일부 소수민족 군대가 미국편에 서서 싸웠지만, 어디까지나 특수부대였고, 전선의 진전을 가지고 오진 못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전투만 보자면 베트콩들이 미군에게 밀렸다. 미군은 C-130과 같은 지상 화력 지원이 가능한 항공기들 부터 항공모함, UH-1 헬기 등 최신식 무기를 전쟁에 동원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는 미군이 아무리 폭격을 퍼부어도 큰 타격이 없었다. 미국은 대략 6년간 200만 톤 이상이나 되는 폭탄을 호치민 루트 전역에 투하했었는데, 투하한 폭탄량에 비해 전술적인 성과가 별로 없었다. 심지어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은 호치민 루트에 있는 거점 캠프에선 자급자족 형태로 농장까지 만들어 이용했다. 그 거점 캠프에서 자급자족 형태로 식물을 재배하기도 했고, 돼지나 닭 오리를 기르기도 했다. 거기다 미국은 호치민루트 폭격 도중에 피격으로 500대의 전투기를 잃었는데, 이는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이 잃은 항공기의 1/7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생각보다 미군의 전사자도 적잖게 속출했는데, 1967년 12월까지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이 대략 2만 명이 넘어갔다. 1967년 10월 대략 20일 동안 콘툼 성 근처에서 벌어졌던 닥토 전투에서 361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40대 이상의 헬기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지상포화로 파괴되었으며, 미군의 최신식 항공기 록히드 C-130 허큘리스 두 대도 파괴되었다. 1967년 대략 2만 명 이상의 미군의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이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넘어갔다. 그러나 린든 존슨 정부가 항상 선전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초기 개입 당시만 해도 남베트남의 국토 75%를 베트콩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거짓말로 국민을 더 이상 속일 수 없었다. 1968년이 되면서 미국의 거짓말과 위선이 드러나게 됐고, 또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구정 공세[편집]

1967년 북베트남의 제2인자이던 레주언(Le Duan)을 비롯한 지도층들은 베트남의 대명절 구정을 틈타 대규모 봉기를 계획했었다. 그들은 호치민 루트를 통해 상당수의 병력과 물자를 남베트남에 보냈고, 남베트남에 있던 베트콩들은 남베트남 전역에 침투하여 베트남 대명절인 구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정 공세 이전 1만 5,000명 내지 2만 명 규모의 북베트남 정예군 325사단과 304사다니 호치민루트를 따라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 확인 되었는데, 304사단은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사단이었다. 1968년 1월 31일 대명절을 알리는 불꽃놀이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세가 시작되었다. 구정 공세 초기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공격했던 베트콩의 자살특공대와 공병대는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미대사관 1층을 7시간 동안 점령했고, 사이공 시내에서 약 2주 동안 전투가 지속되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휴양도시인 베트남 황궁이 있는 후에를 점령하고, DMZ와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케산을 포위하여 제2의 디엔비엔푸를 연상시켰다. 남베트남에 주둔하던 50만 명의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기습공격을 받았기에 아주 잠깐 동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게 밀렸다. 그러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기대와는 달리 남베트남 민중의 내부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응우옌 반 티에우 정권 또한 무너지지 않았다. 시가지에서의 전투가 지속됨에 따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막강한 화력을 가진 미군에게 밀렸고, 1달간의 전투 동안 미국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포함하여 많은 도시들이 대부분 몇 주안에 전투가 종결되었지만, 옛 황궁이 있는 후에의 경우 대략 1달간 교전이 벌어졌다. 구정 공세 1달 기간 동안 공격을 게시했던 베트콩은 37000명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미군은 25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케산 포위전만 보더라도 베트콩은 1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구정 공세에 승리한 미국은 또 다른 전쟁에 휩싸인다. 바로 자국 내에서 일어나는 반전운동이다. 결국 통킹만 사건을 일으켰던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반전여론에 휩싸이며 재선에 실패하고, 공화당의 후보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폭격도 1968년 11월 잠시나마 중단되었다.

반전 운동[편집]

베트남전 반전 운동은 대학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1965년 부터 일어났었다. 하워드 진이나 노엄 촘스키 같은 지식인들이 대다수였다. 따라서 1965년에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격화될수록 이 반전운동은 규모가 커졌고, 1968년 구정 공세가 미국 전역에 방송됨에 따라 전 대중적인 투쟁으로 확산되었다. 반전 운동은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과 더불어 같이 진행되었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1960년대 미국은 징병제도였다. 미국의 징병제도로 인하여 가난한 백인의 자식들과 노동계급의 자식들 그리고 흑인의 자식들은 지옥의 베트남으로 가게 됐지만 대학을 다니는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 엘리트 계층들은 학업을 핑계로 징병을 언제든지 피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베트남으로간 흑인군인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주둔 미군의 총 병력 13%를 흑인이 차지고 이는 미국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과 비슷한 수치였다. 즉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미국 징병제도는 계급과 빈부 그리고 인종간의 불평등이라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반전운동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반전운동은 68혁명과 여성운동 그리고 흑인인권운동이 결합된 형태였다. 반전운동을 대하는 미국정부의 방식은 생각보다 무자비하고 거칠었다. 시위대가 반전운동을 하면 거리에 있는 미국의 경찰들은 곤봉을 돌고 시위대를 서슴없이 후려치기까지 했고 반전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화기와 물대포가 동원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는 주방위군을 동원하기 까지 했다.

심지어 1970년 미국의 오하이오 켄트주립대학교에서는 반전성향이 강한 학생들이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였는데 주방위군이 발포하여 4명이 죽고 9명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실제로 1968년 선거에 나왔던 유진 매카시는 시위대를 진압하러 온 경찰이 자신의 선거대책사무실이 있는 15층까지 쳐들어가 사무실 직원 40명이 경찰관들에게 둘려싸여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무자비한 진압을 하는 경찰을 나치 돌격대라 비유하기도 했다. 1970년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사건과 더불어 미국의 반전여론을 불붙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였다. 이 펜타곤 페이퍼에는 그 동안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과정이 아주 상세히 서술되어 있었는데, 1964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통킹만 사건이 사실은 미국 측의 조작이었다.

1972년에는 미국의 유명한 배우인 헨리 폰다의 딸이자, 사회운동가인 제인 폰다(Jane Fonda)가 하노이를 방문하여 놀라게 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방송에서 "베트남 전쟁은 미제국주의가 일으킨 잔인한 전쟁인 것과 제국주의자 닉슨은 자존심 때문에 철수하기를 회피하고 있다"라고 하며 미제국주의에 대한 아주 날카롭고 사실에 기반한 비판을 했다. 당연히 미국의 극우 세력들과 베트남 전쟁 찬양 세력들은 그녀를 매우 싫어하지만 사실 그녀가 방송에서 발언했던 것은 전혀 틀린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닉슨 정부는 철수를 회피하기 위해 1970년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1971년에는 라오스를 침공했었다. 그외에도 많은 반전 운동가들이 베트남 전쟁 시기 북베트남을 방문했었다. 미국민중사의 저자로 유명한 하워드 진(Howard Zinn)도 그러했다. 구정 공세 이후 하노이를 방문한 하워드 진은 자신의 저서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베트남에서의 폭격 경험담을 얘기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수로 근무하며 했던 폭격에 대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더더욱 생각해 보게 되었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반전운동의 주 핵심 세력은 1950년대 미국의 비트족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히피들이었다. 히피들은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와 더불어 여러가지 투쟁들을 전개했었다. 남녀평등, 인종 차별 철폐, 제국주의 반대 투쟁, 프리 섹스 운동, 성소수자 권리 투쟁등이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하던 히피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 전개했던 투쟁들이었다. 이들은 마리화나 같은 마약을 하고, 너덜너덜한 청바지와 엉킨 장발 패션 차림으로 떠돌아 다녔다. 1969년 이들은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을 개최함으로써, 자신들 만의 세계와 정서적 위안을 찾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 반전 운동은 1968년 당시 세계적으로 일어난 소위 68혁명과 맥을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호! 호! 호치민! 체! 체! 체게바라!"와 같은 구호를 외쳤던 서방의 젊은이들이 그러하다. 이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은 비단 전쟁을 치르던 당사자인 미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그리고 일본에서도 베트남 전쟁을 규탄하는 집회가 있었다. 따라서 이런맥락에서 볼 때 베트남 전쟁은 국제적인 반전운동이 있었기에 미제국주의가 전쟁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통일[편집]

1969년부터 전투가 지속되면서 북베트남을 향한 미군의 폭격도 재개되었지만 이때부터 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닉슨 정부는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생각하면서도 베트남에서의 전투를 계속했다. 닉슨 정부는 베트남화 정책(Vietnamazation)이라 하여, 단계적인 지상군 철수를 감행한다. 따라서 1969년 50만이던 군대가 점차 감축하여 1972년에는 10만 명 안팎으로 줄었다. 이 과정에서 닉슨 정부는 1970년에는 베트콩이 활동한다는 이유로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무차별 폭격으로 최소 40만 이상의 캄보디아인을 학살했다.

더 나아가 닉슨 정부는 람손 작전이라 하여 1971년에는 남베트남군을 앞세워 라오스를 침공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하면서 동시에 대규모 병력의 미군 철수도 이루어 졌고 북베트남과의 협상도 이루어 졌다. 즉 미국의 라오스 캄보디아 침공은 사실 미국이 협상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따내기 위해서 벌였던 협박이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미-소(혹은 중국의) 데탕트 분위기를 의식하여 대규모 공세인 부활절 공세를 감행했다. 대략 700대 이상의 전차 및 장갑차가 동원된 남베트남 전역에서의 공세였자만, 미국은 이를 막강한 공군력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북베트남의 목적은 종전이 굳어지기 전에 보다 많은 수의 병력을 남베트남에 진군시켜 유지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고, 부활절 공세는 이 점에선 성공적이었다. 이후 미국은 마지막 협박으로 1972년 11월에서 12월 북베트남에다가 대규모의 폭격을 감행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북베트남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물론 이 폭격을 통해서 미국이 얻은 것은 없었고, 결국 미국은 1973년 1월 파리 평화 조약을 맺고 베트남에서 완전히 발을 뺀다. 비록 미국이 완전 철수 하긴 했지만 군사고문단 50명 정도는 남겨두었고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은 계속 되었다. 이에 맞춰 한국군도 1973년 3월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1974년 12월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남베트남에 대한 총공격을 계획하게 되었다. 1975년 1월 북베트남군은 실험삼아 남베트남군이 있는 푹롱 성을 공격했고 3주 만에 점령했다. 그해 3월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을 향해 총 공세를 펼쳤고, 남베트남군의 주요 군사 거점지였던, 닥락성 부온마투옷을 점령하고, 이후 다낭과 후에를 점령했다. 그리고 1달 뒤인 4월 3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끝이난다. 즉 베트남은 외세의 끈질긴 침략을 무찌르고 승리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전사자와 북베트남군 그리고 베트콩 전사자의 수치를 들어 베트남 전쟁 시기 사실상 미국이 승리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이는 미군 전사자만 보고 하는 소리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전사자는 대략 5만 8천 명이고, 베트콩 및 북베트남군 전사자[8]가 100만이기는 하나, 당시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투하한 폭탄에 4배에 달하는 800만 톤을 베트남 전쟁에서 소모했고, 전쟁 과정에서 대략 80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를 잃었으며, 대략 5000대의 헬기와 3700대의 항공기를 전쟁에서 잃었다. 4~5대의 항공모함을 베트남에 배치했던 적도 있었다. 즉 이러한 비율을 가지고 베트남 전쟁을 보았을 때, 미군의 손실 및 낭비 또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비교할 거 없이 절대로 적은 손실이었다고 할 수 없다.

전후 처리[편집]

1975년 베트남이 통일 된 이후 베트남 또한 전후 처리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대략 100만 이상의 보트피플들이 발생했고, 100만 명 이상이 재교육을 받았다. 물론 말이 좋아 재교육이지 경우에 따라선 몇 년 이상 감옥생활을 하게되는 경우가 적잖게 있었다. 이들 중 10만 명 이상이 가혹한 처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관련 증언 대부분이 현재 미국이나 프랑스에 있는 보트피플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당시 베트남 공산당에 의해 일어난 전후 처리 과정에서 수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학살 당했고, 당시 남베트남에 맞서 싸웠던 베트콩들이 토사구팽식으로 숙청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국내의 수구세력들은 이런 군대 정훈 교육에서나 나올법한 엉터리 거짓 선전을 믿겠지만, 진실은 이와 다르다. 베트남 통일 이후 대규모의 학살은 없었고, 베트콩들의 경우 정치 경력에 있어서 북베트남 보다 덜 대우 받았던 것은 사실이나, 대량으로 숙청당하지는 않았고, 도이머이 정책 이후 베트콩 출신들 또한 베트남 공산당의 주요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위에서 상술한 재교육의 경우 대부분 단기간에 풀려났다. 대부분의 하위직 공무원은 3일간의 집체교육과 반성문만으로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면제받았고, 일부 고위 공무원들은 장기간 구금되거나 일부 처형되는 경우였다. 가혹처사를 받았던 이들도 대부분 10년 이내에 풀려났다. 대한민국의 경우 비전향 장기수가 최대 40년 이상을 감옥에서 복역했던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당시 재교육 프로그램은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잘했다곤 할 순 없어도 대체로 빨리 풀어준 편이다. 즉 대한민국 군대에서 보여주는 보트피플이니 월남패망이니 통일후 수백만이 학살 당했다니 뭐니하는 영상들은 조작과 날조 반공주의에 입각한 역사 왜곡의 산물이다. 그런 반공주의에 기반한 프로파간다용 영상들이 유튜브를 포함한 인터넷에 어떠한 팩트 체크도 없이 나돌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내용을 정리하자면,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보트피플이나 재교육 과정은 분명 있었으나, 일부 반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대규모의 학살은 없었으며, 새간에 알려진 것들은 대부분 과장된 정치적 프로파간다다.

전쟁 범죄[편집]

미국인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미국인 관할을 순찰하던 한국인들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을 출신의 한 아이가 그들의 부대로 걸어 들어가 몸에 묶고 있던 베트콩 폭탄을 폭발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마을 아이들에게 끔찍하게 보복했다. 그 사건 이후에, 한국인 병사들이 학교로 가서 소년 몇 명을 끌고 나와 우물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본보기로 삼기 위해 그 속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이런 짓을 하는 한국인들이 마을 사람들 눈에는 프랑스인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따라다니면서 더 거칠고 비열하게 굴었던 모로코인들처럼 보였다. 2차 대전 때의 일본인들처럼, 한국인에게는 양심이 전혀 없어 보였고, 무자비한 살인기계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나라를 지저분한 거래를 할 수 있는 딱 알맞은 장소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p.198~199

한국군의 학살은 새벽 1시경에 이루어졌지요. 그들은 이곳의 주민들 전체를 모두 한곳에 모아 놓고,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쏘아 죽였지요. 모두 105명이 죽었지요. 그중에 내 자식들도 세 명이 있었습니다. 학살 당시 나도 입에 파편을 맞아 지금 이렇게 입이 돌아갔습니다. 나에게는 모두 네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전쟁 통에 모두 잃었습니다.

미안해요 베트남 p.150

몇 시간 만에 500명을 죽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그것은 꼭 가스실 같다. 히틀러가 했던 것 말이다.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50명씩 세워놓고, 그냥 쓸어 버리면 된다. 그렇게 했다. 25명, 50명, 100명씩 말이다. 그냥 죽였다. 그들을 모아놓고, 나와 동료 몇 명이 M-16 소총을 자동으로 한 다음 다 쏴 죽여 버렸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p.161

미라이 양민 학살 사건은 군부의 엄격한 통제로 1년간 철저히 은폐되었다가, 1969년에 기자들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건이다.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로스 캘리 W.L Calley 중위는 소대원 30명을 이끌고 중부 꽝응아이 성의 한 마을에 진입하여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 약 500명을 무차별 살해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87

베트콩이 나타나면 마을을 몰살시켰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 며느리 다 죽여버렸어. 싹 쓸어버렸어. 그러니 베트콩이 우리를 손댈 수가 없어. 그때는 잔혹 행위 같은 걸 우리가 자행을 했어요.

베트남 전쟁 p.100~101

농민들은 논에서 생계 유지를 위해 또 다른 투쟁을 해야만 했다. 전략촌이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집단농장의 형태로 변질되어 몇 명의 장성들이 봉건 영주들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도시로 통하는 도로는 세금과 전쟁을 피하기 위한 남베트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경작지가 황폐화되자 농민들에게는 쌀과 총이 동시에 지급되었다. 농민들은 최소한의 식량이라도 보장받기 위해 자식들을 전장에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매달 2000여 명의 농민들이 전장에서 죽었다. 비율로 따져보면 외국군 1명당 20명꼴이었다. 지방 관리들은 노인들에게 주는 최저생계비를 갈취했고, 이런비리가 들통나면 이를 감추기 위해 노인들을 죽이고 논바닥에 버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253

베트콩과 민간인 사망자 수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는 실정이다. 베트남 측의 추산치가 더 높기는 하지만 대개 150만~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수십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인도차이나에서 이 전쟁으로 약 3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들 가운데 대다수가 공습으로 사망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p.105

베트남 전쟁에서는 총 500만 명이 사망했다. 5만8000여명은 미군이었다. 나머지는 베트남인으로, 100만 명 정도는 군인이었으나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 사망자 대부분은 폭격으로 죽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국은 베트남 국민 전체를 적으로 놓고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쉽고 안전하게 적을 사살할 수 있는 방법은 공중 폭격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여겼던 것이다.

좌파 세계사 p.654

베트남 전쟁 자체가 남베트남 내부에서 일어나는 비정규전이었다 보니 전쟁 범죄가 적잖게 일어났다. 특히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저질렀고, 잔혹했다. 1971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오즈번은 피닉스 작전에 대해 증언했다. 캐나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군이 전개한 피닉스 전략을 통해서 1968년 부터 1971년 까지 약 2만7천명을 체포하여 2만명을 어떠한 물증이나 근거도 없이 학살했다고 한다.[9] 이 작전에는 미 해군 특수부대인 네이비 씰(Navy Seal)과 그린베레(Green Beret)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의 특수부대들이 참여 했고, 그리고 남베트남 비밀 경찰들이 참가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을 납치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성고문, 전기고문, 거꾸로 매단 상태에서 행하는 물고문 그리고 무차별 구타와 같은 잔혹한 고문들을 자행했다고 한다. 오즈번은 "피닉스 작전은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가장 야수적인 범죄"였다고 털어놓았고, 6인치 나사못으로 뇌를 관통 당해 사망한 시신을 자신이 직접 확인했다고도 증언했다. 확실한 물증없이 사살된 사람들 대다수는 고문으로 죽거나 산 채로 헬기에 실려 태평양에 던져졌다고 한다. 1970년 봄 사이공 농과대학에 다니던 남녀 학생 11명이 반정부시위와 관련하여 가혹한 고문을 받은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70년 7월 인권유린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맥클로스키 등을 포함한 미 하원의원 4명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이를 확인해보는 일까지 있었다. 심지어 베트남 수용시설 조사단에 참가했던 호킨스 하원의원은 북베트남 미군포로 수용시설이 남베트남의 미군 관활 수용시설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라며 미군의 범죄행위를 규탄하기도 했다.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피해를 보자 화가 난 미군들은 죄없는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68년에 일어난 미군 최악의 학살인 미라이 학살이다.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가 이끄는 미군은 미라이 촌에 들어가 단 하루 동안 총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미라이 학살 당시 미군에게 학살 당한 504명 중 17명이 임산부와 173명의 어린이 그리고 5개월 미만의 유아 56명이었다.[10] 이 학살은 1969년 어느 양심있는 기자의 폭로로 인하여 진상이 규명됐다. 미라이 학살은 당시 학살을 저지른 찰리 부대가 상급 부대에 공식보고한 전황에는 적 128 사살 아군 1명 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미라이 학살이 보여주듯이 제국주의자들의 학살은 얼마든지 은폐될 수 있었다. 당시 학살을 주도했던 사람들 중 윌리엄 캘리 중위만이 처벌을 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닉슨 정부에 의해 가택연금 3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미라이 학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으면 진보위키에 있는 미라이 학살 문서를 참고하라. 그외에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타이거 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가 있다. 1965년 말에 창설된 타이거 부대는 1967년부터 베트남의 꽝응아이성에서 무고한 민간인 에게 베트콩이라는 혐의를 씌워 고문 및 살해하고, 생업에 전념하는 오지 마을을 습격하여 어린이 부녀자 노약자 등 주민을 학살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젊은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살해하고, 희생자의 고환을 잘라 전리품으로 들고 다니는가 하면, 부녀자의 품에 있던 유아의 목을 베거나 군홧발로 밟아 죽였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호치민 루트, 라오스, 캄보디아 그리고 남베트남의 밀림을 무차별 폭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남베트남 숲에 에이전트 오렌지를 비롯한 각종 고엽제를 살포하여 수백만의 민간인들을 죽이고 테러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사망자가 2백만 이상이 나온 것은 사실 미국의 무차별 폭격과 고엽제 투하가 큰 원인이다. 1961년 8월 초부터 1971년 10월 말까지 만 10년 동안 미국은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 총 7300만 리터의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했다. 주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는 고엽제였는데, 베트남 인민 1인당 2.7kg에 달하는 달하는 다이옥신을 퍼부은 셈이었다. 고엽제로 인한 피해는 미군과 한국군 등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그 피해자는 참전 장병 및 그 자녀들을 포함하여 수십만에 이른다. 남베트남에서 미국은 전체 1만 5000개 촌락 가운데 9000개를 파괴했다. 북베트남에서은 산업도시 6곳 모두가 완전히 초토화됐다.[11] 남베트남에서 미군은 소위 수색과 섬멸 작전을 전개하면서 이러한 짓거리를 밥먹듯이 했고, 당연히 이러한 과정에서는 극심한 민간인 사살과 피해를 불러왔다.베트남에서 침략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후일 아메리칸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연하는 자리에서 베트남인 380만 명이 사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위에 상술된 인용문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낸 한국군 또한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68년에 있었던 퐁니 퐁넛 학살이다. 1968년 2월 12일 한국의 청룡부대가 저질렀던 퐁니 퐁넛 학살로 인하여 74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다낭에서 13km 정도 떨어진 이 마을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그대로 있다. 빈호아나 고자이 하미 마을을 비롯한 곳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현재도 있다. 1966년 12월 초 꽝응아이성 빈호아 마을에선 대략 430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집단 학살 당했다. 이외에도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총 5개 성에서 9000여 명이 사망했고, 꽝남, 꽝응아이 그리고 빈딘성에서 학살이 벌여졌고, 꽝남성에서만 4000여 명이 죽었다. 마닐라에서 한인교회 목사로 살고 있는 한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의 체험담에 따르면 당시 백마부대 병사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작전을 나갔다가 귀대하는 길에 대여섯 살 난 아이가 혼자서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한 청룡 부대원이 다가와 "이 아이도 베트콩의 새끼니 죽여야 한다"라고 하여 시비가 일어났었다고 한다. 이 청룡부대원은 그 사람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는 만약 아이를 내주지 않으면 너도 함께 죽이겠다며 방아쇠를 당기려 하여 그 순간 위험을 직감한 동료 부대원이 아이를 청룡 부대원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사람의 눈앞에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발의 총을 맞고 죽었다면서 우울해하던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고 한다.[12] 나무위키를 비롯한 극우파 일베세력들은 이를 애써 부정하려하고, 한국군을 정의로운 군대로 묘사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들이 그리도 사모하는 한국군들은 정의로운 집단이 절대 아니었다. 한국전쟁 시기 국민보도연맹으로 자국민을 수십만이나 학살했던 전력이 있고, 광주에서 수천명을 학살했던 군대다. 그런 군대가 반공으로 무장했음에도 게릴라를 토벌하는 작전에서 학살이 없었을 것이라 보는 것은 분명 관점에 문제가 있다. 나무위키를 비롯한 극우세력들은 미라이 학살을 예시로 들며, 한국군의 학살이 공론화 되지 않은 점에 굉장히 많이 주목하는데, 미라이 학살 또한 군부에서 철저히 은폐하려 했던 사건이다. 심지어 한국군의 규모를 이유로 들어 대규모의 학살의 불가능하다는 식의 서술도 있는데, 그들이 그리도 강조하는 미라이 학살만 보더라도 26명의 미군이 504명을 학살했었다. 베트남 파병 당시 한국 정규부대가 참전했고, 연 5만 명 이상이나 참전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런식의 숫자 비교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그리고 나무위키 같은데에선 절대 언급치 않는 이야기지만, 소위 대한민국 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의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더한 야비한 새끼들 (번역 왜곡; 한국(군)이 일본 보다 더 잔인하다가 맞음{(brutal bastards, worse than Japanese)"이라고 폄하했다.[13] 쉽게 말해 정의의 십자군이니 월남전에서 효율적으로 잘 싸웠다니 하는 얘기는 유치뽕짝 반공주의적 상상력에 가깝다.

나무위키와 극우 세력들이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할 때, 예로드는 사건이 있다. 1966년 맹호부대에 의해 했다고 알려진 고자이 학살이 그러하다. 특히 그들은 현재 고자이 학살 증오비에 그려진 벽화에 그려진 그림을 들며 "그 벽화에 그려진 한국군은 맹호부대가 아니라 남베트남군 레인저 부대다."라는 비공식적인 결론을 내린다. 즉 그들은 고자이 학살의 학살 주체가 한국군이 아닌 남베트남군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고자이 마을 학살 벽화를 보면 그 문양을 보면 남베트남군의 레인저 부대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 따위 추측이 절대적인 진실일 수는 없고, 극우 세력 자신들 만의 상상력이다. 무엇보다 고자이 학살 피해자들은 한국군이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또한 학살을 당했던 피해자들이 부대 마크를 정확히 기억하기는 힘든 일이다. 따라서 고자이 학살을 베트남 정부나 다른 곳에서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피해자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기에 남베트남의 레인저 부대가 했다고 하는 것은 한국군 학살 피해자들의 대다수 주장을 부정하는 행위다. 나무위키와 일베 그리고 수구 꼴통들은 절대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겠지만, 고자이 학살에 대해 자백을 한 전 참전용사가 있다. 선교사인 이우석씨가 그러하다. 맹호부대로 참전하여 고자이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이우석씨는 빈딘성에서 피해자들을 돕는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14]

나무위키가 "베트콩의 조작"이라고 단정하는 '린선사 사건'의 경우 베트콩의 조작이라 1969년에 보도했던 기레기 언론인 동아일보의 기사와 한겨레 21에서 린선사 사건 증인이 쓴 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무위키 반공주의자들은 자신들 멋대로 베트콩의 조작이라고 지껄이고 있다. 나무위키를 비롯하여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몇몇 반공주의자들의 행위는 마치 제주4.3 학살이나 국민보도연맹 학살 그리고 광주학살을 부정하는 태극기 부대나 고엽제 전우회의 논리 혹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난징 대학살 징용 문제 일본 제국주의 침략문제를 전면 부정하는 일본 극우 세력들과 하등 다를게 없는 짓이다. 즉 나무위키에서 보이는 그런 식의 논리가 과거 제주 4.3 학살과 국민보도연맹 학살 그리고 5.18 광주 학살을 지배세력들이 합리화 시키기 위해 썻던 극악무도한 논리일 뿐이다. 추가적으로 얘기하자면 나무위키 같은 곳에선 절대 언급치 않은 사실이지만, 베트남인들은 대체로 한국군을 부정적으로 기억한다. 심지어 한국군의 동맹인 남베트인들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남베트남 공군 총사령관인 응우옌 까오 끼[15]가 한국 병사들을 부패와 암거래로 고발하기도 했었다.[16] 나무위키 같은 곳에선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 또 다른 사실을 얘기하자면, 하미 마을 학살을 기록한 하미 마을 증오비가 설립될 당시 마을 사람들은 한국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기를 원했지만 추모비를 세우는 데 돈을 지불한 한국의 퇴역 군인들은 당연히 기록의 삭제를 요구했었다.[17] 즉 그들은 자신들의 저지른 학살을 숨기기 위해 돈으로 매수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학살이 없었다는 나무위키나 수구 세력들의 궤변은 눈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의한 학살은 없었던 것일까? 기록에 따르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의한 학살이 보고가 아예 없진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구정공세 당시 후에 전투에서 발생한 학살이다. 물론 구정 공세 시기 발생한 소위 '후에 학살'은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이 전개한 후에 사건은 사실상 사이공 협력자 처단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일정부분의 묻지마 학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한달간 3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후에 전투 당시 미군 전투지원사령부는 게릴라 포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서류 뭉치에서 행정 공무원 1,893명, 정치인 48명, 악덕 지주 790명을 처형했다’고 기록된 문서를 확인했다.[18] 따라서 후에 학살이라고 알려진 사건 또한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들이 그랬던 것 처럼,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 후에 학살을 운운하며 반공주의에 기반한 선전을 일삼지만, 이 전쟁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인 주체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오로지 공산주의를 악마화하고 제국주의자들의 실상을 가리고자 하는 극우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적인 성질이 강하다. 또한 후에에서의 학살은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후에를 탈환한 남베트남군에 의해서도 발생했다. 남베트남측은 후에를 탈환한 이후 보복단을 조직해서 월맹 점령하 부역자 학살에 나섰으며, 탈환 이후 발견 된 수천구의 시체 중 얼마가 그 남베트남측 보복에 의한 것인지 알길이 없다. 그것과는 별개로 미국의 전면적인 베트남 전쟁 개입 이전에 베트콩들이 촌락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지방 관리와 남베트남에 우호적인 협력자들을 대상으로 포섭에 실패할 경우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트콩들의 경우 민중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싸웠기 때문에 설사 그러한 학살이 있었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다. 이규봉 작가의 저서 '미안해요!베트남'에 따르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어떠한 원칙을 목표로 했는지 알 수 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은 1.인민을 존중할 것, 2.인민을 도울 것, 3.인민을 수호할 것, 4.토지작물에 피해를 주거나 인민의 가옥과 재산을 침해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 5.인민이 판매나 대여를 원하지 않는 것은 구매나 차용을 요구하지 말 것, 6.살아 있는 암탉은 산악 민족의 집에서 가져가지 말 것, 7.약속은 어기지 말 것, 8.인민의 신조나 관습을 무시하지 말 것, 9.우리의 인민을 경멸하고 있다고 오해를 받을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 것, 10.일상 작업에서 인민을 도울 것, 11.가능할 때는 언제나 시장에서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물건을 구입해 줄 것, 12.여가 시간에는 항전에 쓸모 있는 이야기를 하되 보안에 주의할 것, 13.주민에게 국어와 기본 위생을 가르칠 것, 14.처음에는 공감대를 조성하기 위해 그리고 나서는 미신을 버리게 하기 위해 각 지역의 관습을 연구하며 그에 친숙해지도록 할 것, 15.올바르고 근면하며 훈련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인민에게 보여줄 것 등을 목표로 삼았다.[19] 따라서 베트콩이 학살을 무자비하게 조성했다거나 아무런 이유없이 마구잡이로 학살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반공주의에 기반한 허황된 날조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 찬양하는 반공주의자들은 어느 정신나간 미국의 네오콘 학자는 자기 멋대로 덧샘 뺄샘한 근거 출처 불명의 이상한 계산기 자료를 가지고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최소 13만에서 30만을 학살했다는 소리를 지껄이지만, 말그대로 전혀 검증되지 않은 거짓말일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학살이 1이면 한국군의 학살이 6이었듯이 베트남 전쟁 또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 보다 연합국에 의한 학살이 더 많았다. 네오콘 학자 루돌프 럼멜은 자신이 만든 통계에서 미군의 폭격을 학살로 간주하지 않는데, 눈가리고 아웅식 논리다. 애초에 폭격 자체가 적이라는 타겟을 죽인다는 목적하에 민간 지역에 폭탄을 투하하게 되는 데 그것이 학살이 아니라면 일방적인 학살도 학살이 아닌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미군의 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수백만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는 분명한 전쟁범죄다. 베트남 전쟁을 연구해온 윤충로 교수의 박사 논문인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에 따르면 베트콩과 같은 세력들이 용의주도한 대량학살작전을 써서 상당수의 비무장 민간인을 죽였다는 확증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연합국 측에 비해 훨씬 적었다고 한다. 그것은 수년간 프랑스 제국주의와 싸워오면서 대중들을 설득하고 끌어들였던 그들의 경험에 기반한 행동이었다. 또한 베트콩 총사령관이던 호앙 반 타이는 민간인 학살과 무차별 폭행 그리고 강간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중국 혁명 시기 마오쩌둥이 이끌던 홍군이나 이현상 사령관 휘하의 지리산 빨치산, 나치 치하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던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 군대 그리고 쿠바 혁명 당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게릴라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역사적으로 게릴라 투쟁에 있어서 기본적인 지침이었다. 그런 군대가 수십만 단위로 학살했다는 어느 정신나간 유치뽕짝 네오콘의 주장은 게릴라 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모르는 행위일 뿐이며 몰역사적 시각이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을 정리하자면 베트남 전쟁 당시 양측 모두 학살이 있긴 했지만, 그 학살이 가장 심각했던 것은 북베트남이나 베트콩이 아닌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다.

침략 논쟁[편집]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는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반지성적인 광적 반공주의하의 대한민국 사회에선 베트남 전쟁을 마치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침략인 것 처럼 왜곡해왔다. 그런 반지성적인 광적 반공주의 사상을 가진이들은 현재도 이와같은 주장을 사실로 믿고 있다. 이는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나무위키나 수구 세력들의 유튜브 영상들을 비롯한 문서 및 매체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침략으로 일어났다고 하며 학계의 일반적인 서술과는 동떨어진 주장을 하고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현실 부정일 뿐이다. 일각에서는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세력이 호치민과 북베트남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쪽은 미국과 응오딘지엠이었다. 반공주의자들은 마치 베트남 전쟁이 간첩들과 게릴라들이 일으킨 것 처럼 과대 포장하지만,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얘기하는 베트콩은 1960년 남베트남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조직이었다. 물론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았으나, 어디까지나 지원이지 북베트남의 공식적인 개입이 아니다. 반공주의자들의 궤변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 인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64년 통킹만 사건이다. 이는 사건을 조작한 로버트 맥나마라도 인정했고, 미국 또한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사건을 조작했던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물이다. 위에서 상술한 북베트남군의 침투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면, 그런식의 국경 침입은 비단 북베트남군만 했던 것이 아니다. 미국의 그린베레와 마이크 포스같은 특수부대들 남베트남군 특수부대들 또한 DMZ나 호치민 루트 쪽을 마구잡이로 넘어가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무시하는 건 마치 나치독일의 런던 대공습과 같은 영국 폭격이 영국에 대한 침략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비슷하다. 1971년 반전운동가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7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펜타곤 페이퍼는 당시 미제국주의가 1945년 부터 1967년까지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계획하고, 실행했는지를 낱낱이 밝혔다. 따라서 북베트남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극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역사 왜곡이다.

반공주의적 시각에서 베트남 전쟁을 해석한다면 통킹만 사건은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으로 인하여 시작된 사건이었고, 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이를 북베트남이 지원하면서 시작된 전쟁일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부터 이미 개입한 상태였고, 남북베트남의 분단 고착화 시킨 주체가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0년에 남베트남에서 창설된 베트콩은 어디까지나 남베트남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였고, 북베트남은 이를 지원하는 형식이었다. 해방 후 한반도 상황에 비교해 놓고 보자면, 제주 4.3 항쟁이나 여순민중항쟁과 같은 대한민국 내부에서 일어난 항쟁들과 비슷한 형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제주 4.3 항쟁이나 여순민중항쟁을 북한의 침략행위로 간주하지 않듯이, 베트콩이 남베트남 내부에서 전개했던 무장 투쟁 또한 북베트남의 일방적인 침략행위로 볼 수는 없다. 북베트남의 공식적인 남베트남 침공 행위는 베트남 전쟁이 거의 다 끝나가던 1972년 ‘부활절 공세’를 감행하면서 부터인데, 이 시기에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함에 따라 단계적인 철수를 감행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소위 우리가 일반적으로 간주하는 베트남 전쟁의 성격이 바뀌게 되는 시점이다. 여기서 나올 수 있는 주장이 구정 공세에 관한 것인데,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했던 구정 공세 또한 베트콩이 주축이 되어 전개했고, 공격을 감행한 대부분의 병력은 베트콩들이었다. 민주화 운동가이자 베트남 전쟁을 연구한 리영희가 쓴 베트남 전쟁에 나오는 구절이다.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는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반지성적인 광적 반공주의하에서 학문적 진실을 추구했던 그는 베트남 전쟁이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베트남 전쟁은 그에 앞선 스페인 내전과 함께 현대사에서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이라고 일컬어져왔다. 근대에 들어서 동서양에 많은 전쟁이 있었고, 20세기 현대사에서만도 전체 지구를 덮은 처절한 전쟁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유독 스페인 내전과 베트남 전쟁을 두고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괴로워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베트남 동란'은 그 성격과 배경이 복잡하다. 그 전쟁의 한쪽 당사자가 공산주의 세력이고 다른 한쪽이 반공주의 세력이라는 사실만으로 베트남 동란을 '공산주의 대 반공주의의 대결'로 획일화한 단색적 도식화는 진실에서 너무나 먼 것이었다. 바로 그 '반공산주의'의 주도자로 그 동란에 뛰어든 미국이 결국 실패라고 만 것은 베트남 동란의 복잡한 성격과 배경을 지나치게 단색적으로 도식화했던 결과다. 베트남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연합국의 승리로 일본의 점령에서 해방되었다. 그러자 인도차이나반도를 100년 동안 지배하다 일본에 쫓겨나갔던 프랑스는 일본의 철수 후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군사적 재점령을 시도했던 것이다. 호치민을 지도자로 하는 베트남 인민은 일단 손에 넣은 독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독립세력과 식민세력, 아시아 후진민족과 유럽 백인세력, 원시적 민병과 현대적 군대 사이의 8년간에 걸친 전쟁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의 결정적 패배로 끝났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또는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인민은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그 승리를 다지는 강화조약인 제네바 협정으로 국토와 인민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운을 감수해야 했다. 제네바 협정은 "북위 17도선을 임시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베트남 인민군과 프랑스 연합군은 각기 군사분계선의 북쪽과 남쪽으로 철수하여 집결한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은 결코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로 해석될 수 없다. 이 협정체결로부터 2년 후인 1956년 7월 남북베트남을 아우른 총선거를 실시하여 베트남을 통일되도록 한다"고 규정했던 것이다. 약속된 총선거에서 호치민의 승리가 확실한 것을 예상한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해서 남베트남의 실권을 장악하는 한편, 미국에 망명 중이던 응오딘지엠을 들여보내 총선 실시 거부를 선언케 하였다. 이 시점에서부터 제2차 베트남 전쟁 즉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거니와, 베트남 전쟁은 그러므로 단순한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다. 민족주의 대 제국주의, 독립투쟁 대 식민주의, 혁명 대 반혁명, 통일 대 분열, 독립 대 의존, 인권 대 반인권, 자유 대 억압, 황색인 대 백색인, 아시아 대 서양, 낙후 대 현대, 원시적 소총 대 초현대식 폭격기, 주판 대 전자 계산기, 사랑 대 증오 그리고 그밖에도 상상할 수 있는 20세기의 모든 갈등요소가 뒤범벅이 되어서 전개된 전쟁이었다. 그것이 "20세기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베트남 전쟁 p.5~7


위에 인용한 리영희의 책은 베트남 전쟁을 마치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일으킨 것으로 보는 관점은 박정희 시대의 반공주의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나무위키를 포함한 극우세력들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 마치 공산주의측이 일으킨 것 처럼 역사왜곡을 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북베트남군 또한 구정 공세 당시 공격에 참가하긴 했지만, 북베트남측의 공식적인 남베트남 침공 행위는 1972년 부활절 공세 때고, 1968년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감행한 구정 공세는 남베트남에서 일으킨 내부 봉기에 가까웠다. 1964년 일어난 통킹만 사건의 핵심은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이 있었느냐 혹은 없었느냐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명분을 찾기 위해 한 사건을 조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생각해 보았을 때,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는 일각의 주장은 역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주장이 아닌 정치적인 선전 영역에 가까우며 과거 미국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인 베트남 전쟁을 합리화 하려는 주장이다. 따라서 미국이 전면적으로 참전하게 된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이 일으킨 전쟁이 아닌 미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이다.

대중 매체[편집]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한 미국 영화들은 매우 많다. 물론 그 영화들 중엔 <그린 베레>[20]나 <에어 아메리카>[21] 그리고 <위 워 솔져스>같이 미국이 백전백승 한다는 미국식 영웅주의를 시전하는 소위 국뽕영화도 있지만, 대체로 작품성이 높은 영화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작품을 뽑자면 <풀 메탈 자켓>이나 <플래툰>, <지옥의 묵시록>, <굿모닝 베트남>, <전쟁의 사상자들> 그리고 <7월 4일 생>등이 있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부정적으로 다루며 주로 반전을 호소한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들은 대체로 작품성이 높은 편이다. 한국에서 만든 작품성 있는 베트남 전쟁 영화로는 <하얀 전쟁>과 <알 포인트> 그리고 <님은 먼 곳에>가 있다. 2017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더 포스트>라는 영화도 있는데, 미국의 거짓말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다. 베트남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로는 PBS에서 만든 <베트남 전쟁: The Vietnam War>이 있다. 다만 1편당 평균 1시간 25분 이상의 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다큐멘터리이기에 보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굉장히 많은 인물의 인터뷰와 증언을 토대로 제작되었고, 베트남 전쟁을 객관적으로 보려했던 감독의 각고한 노력이 곳곳에서 보이는 작품이기에 베트남 전쟁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감상할 가치가 매우 높은 명작이다. 그외에도 2019년에는 1966년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베트콩과 교전을 벌였던 <롱탄 대전투: The Battle of Long Tan>라는 영화가 개봉했다.[22]

관련 서적[편집]

미국에는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한 서적들이 아주 많지만, 정작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냈던 한국의 경우 출판된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은 아쉽게도 그리 많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책들보다도 적다. 여기에 언급된 책들 대부분은 이 글을 쓰는데 참고했던 서적들이다.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저, 유경찬(역), 을유문화사 출간, 2002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저, 힌겨레 출판 출간, 2015
  •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저, 정병선(역), 책갈피 출간, 2004
  • 최고의 인재들, 데이비드 핼버스템 저, 송정은 황지현(역), 글항아리 출간, 2014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저, 창비 출간, 1974
  • 역사 속의 베트남 전쟁, 후루타 모토오 저, 박홍영 (역), 일조각 출간, 2007
  •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비엣 타인 응우옌 저,부희령 (역), 더 봄 출간, 2019
  • 베트남 전쟁의 한국 사회사, 윤충로 저, 푸른 역사 출간, 2015
  • 1968년 2월 12일, 고경태 저, 한겨례 출판 출간, 2015
  •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저, 푸른 역사 출간, 2011
  •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윤충로 저, 선인 출간, 2005[23]

각주[편집]

  1. 미국이 프랑스에게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한건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부터였다. 심지어 그들은 1954년 디엔 비엔 푸가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전투병 파병을 고려하기도 했었다.
  2. 미국에 협력했던 소수민족으로는 에데 족, 참족, 브루 족 등이 있다.
  3. 이들이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그랜 토리노에 나왔던 애들이다.
  4. 미국민중사 2 p.214
  5. 그 또한 부패한 인물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1975년 남베트남이 붕괴될 때 그는 비행기 몇 대에 2톤이나 되는 금괴를 실어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도주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매우 부패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264~265
  7. 베트남 전쟁 p.117
  8. 베트남 전쟁 시기 대부분의 전투는 베트콩이 미군을 상대로 치렀다.
  9.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67을 참조
  10. 미안해요 베트남 p.123
  11.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02
  12.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p.425
  13. Jeremy Kuzmarov, Modernizing repression: police training and nation building in the American century, MIT Press, 2012.
  14. 학살 참전 한국군 이우석씨 -남은 평생 하는 일은
  15.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 쿠데타가 지속될 당시 응우엔 반 티우와 더불어 쿠데타를 종결시켰던 인물이다. 즉 남베트남 정치계에서 핵심적인 인물어었다 할 수 있다.
  16.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p.197을 참조
  17.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p.204
  18.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377
  19. 미안해요 베트남 p.101~102
  20. 극우 반공주의자에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한 존 웨인이 출현했다. 내용도 심히 오리엔탈리즘적이다.
  21. 아이언맨으로 유명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국뽕영화에 자주 출현하는 것으로 유명한 멜 깁슨이 주연으로 출연했다.
  22. 호주 또한 베트남 전쟁을 도미노 이론에 입각해서 봤다. 이 영화도 그런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3. 윤충로 교수의 박사 논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