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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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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중도좌파이다. 1919년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고, 운동 신경도 뛰어났으며, 해방 후 에는 좌우의 대립을 극복하고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했다.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에게 암살 당하여 사망하였다.

호는 몽양(夢陽)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생애 초기와 청년기[편집 | 원본 편집]

몽양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 신원리에서 소론계열 집안인 여정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몽양을 낳기전 태몽에서 태양을 품었다하여 그의 호를 몽양이라 붙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가 자주 싸우는 모습을 보았고 스스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입술을 스스로 깨물며 화를 참는 방법을 터득했다. 비록 소론 집안이라 조선시대 당시 권력구도에서 좀 멀었던 집안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몽양은 양반, 상놈 신분 상관없이 동네에 있는 아이들과 잘 놀았다. 14살이 되던 1900년 그는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우등생이었던 몽양 여운형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1년만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배재학당을 그만 둔 여운형은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에 진학했다가 다시 그만두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후, 몽양 여운형은 고향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에 나서며 애국계몽운동에도 참가하며, 집에 있는 노비문서를 불 질러 가지고 있던 노비 전부를 해방시켰다. 일부 양반 가문들이 몇몇 양반들이 여운형의 노비 해방에 시비를 걸자 여운형은“사람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합니다. 그래서 종들을 풀어준 것입니다. 40년 전 미국에선 링컨 대통령이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 유학과 신한청년단 활동[편집 | 원본 편집]

여운형은 동생 여운홍과 대한협회에서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게 되었는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난 뒤 그는 독립운동을 결심하게 된다. 동생 여운홍은 미국으로 여운형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1910년대 여운형은 중국 남경에 있는 금룽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 영향으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 중에던 1918년 여운형은 터키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만든 터키 청년당을 본 받아 신한청년단을 결성하여 1차 대전이 끝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보내어 강대국들에게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파리강화회의의 김규식 파견과 그 영향을 받은 이광수의 2.8독립선언은 즉 3.1운동에 불씨를 제공했고 그 사이엔 신한청년단 당수 여운형이 있었다.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가 수립 되었다. 여운형도 임시정부에서 잠깐 활동 했었다. 1919년 11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일본에 갔다. 왜 일본이 몽양 같은 독립운동가를 초대했는지 의아해 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일본은 독립운동가 회유정책의 한 일환으로 그를 초대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전략은 아주 큰 패착이었다. 몽양 여운형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겁먹기는커녕 오히려 일본 고위직 관료들에게 조선독립을 역설하였고 심지어 일본 고위관료들이 여운형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만큼 여운형이 연설을 잘하고 인간적으로도 감화력이 대단했다는 증거다.

고려공산당 활동과 체포 감옥생활[편집 | 원본 편집]

1920년대는 임시정부에서 초대총령직을 맡고 있던 이승만의 임정요인들과의 불화로 임정 조직이 사실상 와해될 위기에 있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약소민족 해방을 주장하며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조직하여 약소민족 해방을 돕던 때였다. 여운형 또한 영향을 받았다. 1922년 여운형은 극동피압박민족대회 조선 대표로서 지도자 레닌을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모스크바에 간 여운형은 소련의 지도자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고, 레닌에게 조선 독립을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여운형은 1920년대 여운형은 중국에서 장개석 모택동 주은래 손문등 당대 중국 지도자들도 만나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26년에는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대회에서 호치민과 더불어 연설을 하기도 했었다. 중국에서 생활하던 중 1929년 7월 여운형은 상해에서 야구 경기를 보다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다시 조선으로 귀국했다. 1930년 법정에서 3년형을 받았으나 2년 만에 풀러난다. 감옥에 있을 당시 형무소 간수들의 여운형의 인간적인 면모와 긍정성에 반했었다고 한다.

조선중앙일보 사장[편집 | 원본 편집]

석방 뒤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떠돌던 일화가 있다. ‘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떡꺼떡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이 바로 그것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장에 비해 좀 더 탈권위적인 언론사 사장이었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있으면서 백두산 탐방, 이순신 장군 묘소 정돈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체육활동에도 많이 참가하였다. 축구, 야구, 수영 ,체조, 권투, 달리기등 싫어하는 운동 종목이 없을 만큼 여운형 선생은 운동을 좋아하셨다. 말아톤 선수 손기정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가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한 사건을 주도하게 되는 데, 그게 바로 '일장기 말살사건'이다. 그 결과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폐간되었다.

태평양 전쟁 그리고 건국동맹[편집 | 원본 편집]

1937년 노구교 사건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남경을 점령한 뒤, 승승장구 했다.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일본이 유리한 듯 보였다. 이때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일본이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독차지 하려한다면 영국과 미국이 중국 대륙을 혼자 독차지 하려는 일본을 가만히 놔두지 않고 경제적인 제제를 하게 될 것이고 경제제제의 여파로 일본은 지게 된다."는 논리였다. 중국 전선은 교착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940년 여운형을 만나 회유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일본정부의 위기감을 예감한 여운형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질 않았다. 그로부터 1년 뒤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영미 연합군과 전쟁을 하게 됐다. 전쟁은 아시아와 유럽 에서 전쟁을 하는 세계대전으로 확산되었다. 진주만 기습공격에 분노한 미국정부는 그 보복으로 1942년 4월 두리틀 공습이라 하여 일본 도쿄에 폭격을 가했고, 여운형도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되면서 일본 패망을 확신하게 된다. 또한 여운형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했던 단파방송 미국의 소리를 몰래 듣기도 했다. 일본의 협박과 회유가 심해지던 1940년대 초 여운형은 변절하지 않았다. 1944년 일제 패망을 대비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여운형은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결성하였다. 건국동맹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총 망라한 좌우연합 단체였고, 건국동맹 예하에는 농민동맹, 학병, 징병 거부자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계층이 참가했다. 2차세계대전 말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져나가던 몽양 여운형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임정의 광복군과 연합하고자 했지만, 일본이 조기에 항복하면서 무산됐다.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의 8월 폭풍 작전이 진행되자 당시 총독부에 있던 엔도 류사쿠 총감은 여운형과 접촉하여 조선반도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신변을 보호받고자 했다. 그 대신 여운형은 정치범 석방, 식량확보, 주체적인 치안 유지와 같은 요구조건들을 내세운 뒤, 해방 후 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편집 | 원본 편집]

일본이 항복하고 난 뒤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를 명칭을 바꾸고 조선의 치안유지와 새 나라건설을 위해 활동을 이어갔다.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 곳곳에서 결성되었고, 자체적으로 치안 유지를 해나간다. 이미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여운형은 악질적 친일세력을 배척한 좌우연합국가를 원했다. 9월 8일 미군정이 상륙하여 자주독립세력을 짓밟기 시작했고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 인사들을 등용했다. 그러는 사이 미군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이 귀국했다. 1945년 11월 임정 요인들이 귀국했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여 조선의 신탁통치안 관련한 회의를 했다. 초반엔 좌우세력 할 거 없이 다 반탁이었다.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던 한민족에겐 신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실 신탁통치의 내용은 연합국이 조선을 신탁통치 한다는 내용보단 5년간 연합국이 조선을 신탁통치하여 자주적인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선민중과 정치지도자들에겐 신탁통치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삼상회의에서 미국은 신탁통치 10년을 주장하고 소련은 5년 뒤 즉각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나 국내언론들은 신탁통치 내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을 뿐더러 '미국은 즉각 독립을 주장하는데 소련은 찬탁을 주장한다.'는 왜곡 보도를 하였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세력은 소련입장에 찬성한다는 의사를 밝히자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우파진영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매국노로 몰았다. 해방된 지 4,5개월 만에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은 반탁운동을 통하여 애국자로 둔갑했다.

좌우합작운동[편집 | 원본 편집]

신탁통치 논쟁이 불거지자 미국과 소련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담을 한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1946년 5월 정판사 사건을 시작으로 미군정은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을 탄압했고, 46년 6월 전라도 정읍에서 이승만은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한다.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듣게 된 미군정은 남한 내에서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1946년 7월 좌측 대표로는 여운형 우측 대표로는 김규식을 둔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된다. 46년 10월 좌우합작위원회에선 좌우합작7원칙을 만들어 발표했다. 좌우파의 요구를 반영한 원칙이었다. 몽양 여운형은 남북분단 극복과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지만, 이승만과 박헌영 양쪽으로 부터 공격받는다. 좌우합작운동은 1947년 3월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 지지를 철회하고 우익세력을 지지하면서 이승만 세력에게 더더욱 공격받았고, 결국 실패로 끝난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회담이 재게될 조짐을 보이자 여운형은 중도파 정당인 근로인민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여운형에 대한 괴한들의 테러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괴한들의 끊임없는 테러 끝에 몽양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사망한다. 그의 죽음을 시작으로 남북에는 분단정부가 수립됐고,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 점을 생각했을 때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친일세력들의 여운형 친일론?[편집 | 원본 편집]

여운형이 일제시대 내내 조선총독부 및 일본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근거로 여운형을 친일파, 혹은 일제에 부역한 여타 자치론자들과 동일선상에 놓는 주장이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여운형이 일본에 봉사한 증거는 없다. 일본 총독부의 숱한 노력에도 독립과 연결 안되면 여운형은 그들과 협력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운형이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뒷받침이 되는 증언자들이 어째 대부분 하나 같이 친일파 & 한국민주당 출신들이라는 게 엄청난 함정이다. 실제로 해방 후 한민당의 끄나풀인 조병옥과 같은 인물들이 근거없는 낭설을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에게 전하는 치졸한 짓을 일삼았었다. 아무튼 이 떡밥은 학계에서 끝난 지 오래된 떡밥이다. 무엇보다 몽양 여운형에겐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대비했던 행적이 있다. 심지어 뉴라이트 계열에서 출판한 <건국투쟁>이라는 책을 봐도 여운형의 친일론 만큼은 완벽히 부정할 정도다. 따라서 여운형 친일론은 근거없는 소리다.

좌우합작은 과연 공산화의 길이었는가?[편집 | 원본 편집]

이승만을 추종하는 뉴라이트 세력들은 좌우합작이 공산화의 길이었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은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극우파적 언행을 서슴지 않으며,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 운동을 그저 불가능한 일이나 공산화의 길로 치부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몽양 여운형은 엄밀히 따지자면 공산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진보적 민족주의자 혹은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 태평양 전쟁 당시인 1944년 몽양 여운형이 국내에서 조직한 건국동맹과 해방 이후 그가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적구성을 보면 좌우연합의 형태를 띄었고, 이후 몽양 여운형이 보인 행적을 보면 그는 전혀 사회주의적이지도 않았고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좌우합작운동은 1946년 이승만의 정읍 발언 이후 미군정이 추진한 것이었다. 즉 좌우합작 운동은 미군정이 필요로 해서 지원한 것이었고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가 미군정의 지원을 통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성공시키고 통일된 형태의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길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은 적잖은 미군정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고, 미군정이 지지를 철회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또한 미군정이 좌우대표로 내세웠던 인물들마저도 소위 마르크스-레닌주의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고, 몽양 여운형은 소련보다는 미국 쪽하고 보다 협력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좌우합작운동이 공산화의 길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는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