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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오딘지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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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오딘지엠(베트남어: Ngô Ðình Diệm / 한자: 吳廷琰,오정염 / 1901 ~ 1963)은 베트남의 관료이자 남베트남의 정치인으로, 세례명은 쟝 밥띠쓰뜨(Jean Baptiste)이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응오딘지엠은 꾸앙 빙성 레 투이현에서 내부상서 응오 딩 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비의 뒤를 이어 대남 조정 내부상서를 지냈다.

1930년 베트남 국민당과 공산당이 주도한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프랑스에게 공산당원들을 고발했고, 프랑스 당국과 함께 이를 진압하여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관료적인 모습을 보였다.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제국편에 붙기도 하였다. 일각에서는 남베트남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가 '독립운동가라는 점을 강조해서 얘기하는데, 제1차 인도지나 전쟁 당시 사실상 그가 베트남 독립을 위해 한 것은 없었다.

이후 베트남국 수상을 지내다가 보대제를 국민투표로 폐위시킨 뒤, 베트남공화국 건국 후 초대 대통령직에 당선됐다. 재임기간 중 독재정치와 가족정치를 일삼았고, 수 많은 부정부패들을 저질렀으며, 1963년 11월 미국 CIA가 일으킨 쿠데타로 인하여 물러나고 망명중 암살당해 사망한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응오딘지엠은 1901년 1월 3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꽝빈성에서 태어났다.[1] 10대 시절 프랑스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5살 당시 가톨릭 주교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이후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여 법학부에 입학했다. 1921년에 대학을 졸업한 이후 고향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25세 때는 지방군 대장까지 승진했다.

1929년에는 베트남 남부에 있는 빈투언성의 도지사로 임명되었으며, 1931년까지 프랑스 정부를 도왔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디엠은 프랑스를 도왔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프랑스에 고발하는 일을 했다. 당시 베트남 전역에서 일어났던 봉기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번지자, 프랑스 당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의 농민 봉기를 진압했다. 저명한 역사학자 버나드 폴에 따르면 응오딘지엠이 혁명 봉기를 진압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이 봉기로는 프랑스을 몰아낼 수 없다는 판단이었고, 두 번째는 그의 관료직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고 한다.[2] 1933년 응오딘지엠은 당시 황제였던 바오다이로부터 신임을 받아 그의 신하로 임명받았다. 정확히는 바오다이 내각에서 내무장관직을 지냈었다. 그러나 임명된지 3개월 뒤에 황제와 뜻이 맞지 않아 관직으로부터 물러나 향후 10년간 후에(Hue)에서 일개 시민의 삶을 살았다.

당시 응오딘지엠이 사임하게 된 이유에는 프랑스 당국이 바오다이 황제에게 충분한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즉 그것에 대한 항의였던 것이다.[3] 가톨릭을 믿었던 디엠은 과거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고발했던 경력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극단적 반공주의자였다. 또한 그의 집안은 베트남에서 명망있는 집안이었으며, 기본적으로 베트남에서 지배계층이었다. 이러한 디엠의 출신성분과 위치는 그의 반공주의적 성향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을 노골적으로 혐오했으며, 바오다이가 임명한 관직으로부터 물러난 이후에는 프랑스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졌었다.

응오딘지엠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부터였다. 1940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함락된 이후 베트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침략했는데, 당시 응오딘지엠은 일본과 협력해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물론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침략했던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나타났던 현상[4]이긴 하지만, 당시 호치민이 일본 제국주의와 프랑스에 맞서 베트민을 창설하여 항불항일투쟁에 나섰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응오딘지엠은 상당히 크나큰 오류를 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본과의 협력 노선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바오다이 황제와 협력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1945년 3월 일본의 쿠데타로 바오다이가 괴뢰국 황제로 임명된 이후 바오다이는 응오딘지엠에게 새 정권의 수상직을 그에게 제안했는데 그 제안을 사양했다.[5]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베트남에선 미국 OSS와 협력하던 호치민의 베트민이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이른바 8월 봉기를 일으켜 전국적인 민중지지기반 세력으로 등장했고, 9월 2일에는 호치민이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선언을 하며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했는데, 당시 응오딘지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1945년 말기 일본군이 초래한 기근 사태에서의 구제정책과 8월 봉기로 민중의 지지기반을 토대로 전국적인 조직으로 급성장한 베트민은 당시 좌익 세력뿐만 아니라 우익 민족주의 세력들까지 협력 대상으로 확장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베트민은 디엠을 포섭하려는 시도를 했었지만, 태생적으로 관료계급이자 반공주의적 가톨릭 세력이었던 디엠은 이를 거절했다.

물론 여기에는 8월 혁명 당시 그의 형 응오디코이가 베트민에게 처형당하면서 더 강화된 반공주의와 불신도 있었다.[6] 반공주의적인 활동을 벌이던 응오딘지엠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민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이후 호치민이 석방을 결정하면서 궁극적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응오딘지엠은 베트남 전역을 돌아다니다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베트남을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베트남을 떠난 그는 유럽 벨기에에 정착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갔으며[7],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강화되던 1950년대 인맥을 형성했다.

1950년대 초 디엠은 미국에 정착한 뒤 장차 정계로 복귀할 것에 대비하여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던 응오딘지엠은 뉴저지에 있는 가톨릭 신학교에서 몇 달을 보냈으며 “동포를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는 메시아적이고 망상적인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초기에는 워싱턴에서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많은 미국 담당자들이 그를 수도사 같은 비현실적인 인물로 보았고, 정치적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한 미국인 평론가는 그가 ‘메시지 없는 메시아’라고 코웃음칠 정도였다.[8]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9년 소련의 핵개발과 중국의 공산화와 더불어 미국이 개입을 하는 형태로 나타났고, 미국은 전쟁이 끝나던 1954년까지 총 80%의 프랑스 전쟁비용을 대신 지불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식민주의와 미국의 냉전정책이 일맥상통하고 있었다는 근거다.[9]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이끄는 혁명적 농민 군대가 프랑스군을 무찌르자 프랑스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부터 제국주의적 개입을 해오던 미국은 제네바 회담을 통해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을 분단시켜버렸다. 여기에는 2년 이내의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엇지만,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났을 당시 남북으로 분단 된 베트남의 상황은 이러했다. 북베트남은 항일투쟁과 항불투쟁을 해온 호치민과 공산당이 이끌었고, 남베트남은 1949년 프랑스가 미국에게 지원받기 위해 바오다이를 내세워 형성했던 베트남준국가 즉 베트남국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응오딘지엠은 베트남으로 귀국했는데, 당시 프랑스의 괴뢰 황제였던 바오다이는 제네바 협정이 타결되기 2주일 전 응오딘지엠을 베트남국의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바오다이가 응오딘지엠을 통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1950년대 초기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후원을 받으려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응오딘지엠이 아니었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전후로 하여 응오딘지엠은 미국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1955년 당시 그를 후원하는 미국 정치인들은 ‘베트남의 미국 친구들(American Friends of Vietnam)’이라는 단체를 결성해줄 정도였다. 열렬한 디엠 지지파로는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 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상원 의원 마이크 맨스필드, 휴버트 험프리, 존 F. 케네디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강경 보수주의 성향으로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이 본인들의 구미에 맞았던 인물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민족주의자인 디엠이 대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믿었다.[10]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에서 일했던 랜스데일은 1950년대 당시 응오딘지엠과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탄탄하게 구축하는 것이 과제였다. 랜스데일의 경우 응오딘지엠에 대해 “신비스럽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추켜 세울 정도였다.

1954년 8월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기본 정책 구상은 ‘바오다이를 통한 해결’을 ‘응오딘지엠에 대한 해결’로 대체하는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일단 군권은 디엠에 반대하는 친프랑스 집단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갱 집단인 빈쑤옌(Binh Xuyen)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친프랑스적인 호아하오(Hoa Hao)와 까오다이(Cao Dai) 교파들도 그에 대항하는 조직이었다. 비록 아직까진 프랑스가 만들어낸 토착 지배세력의 권력이 강했지만, 미국이 선택한 것은 토착 지배세력의 중심이 아닌 반공 민족주의적 관료계급인 응오딘지엠이었다. 그는 CIA 요원 에드워드 랜스데일의 지원을 받으며 즉각 반대파를 분쇄하고 베트민에 가담했던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으며, 베트민이 총선을 실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위원회 사무실들을 강제로 폐쇄했다. 따라서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친프랑스 계열 조직인 빈쑤옌과 같은 조직에 맞서 전투를 치르며 남베트남의 지도자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항일 항불투쟁의 대중적 조직인 베트민을 동시에 탄압하는 반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즉 응오딘지엠은 말 그대로 친미제국주의적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

1955년 4월 응오딘지엠의 강력한 지지자인 미국의 맨스필드(Mansfield)는 상원 연설에서 바오다이를 응오딘지엠으로 대체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미국의 계획대로 디엠은 바오다이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할지, 혹은 디엠의 새로운 정부를 인정할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55년 10월 23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국민투표가 실행됐다. 결과는 득표율 98.2%의 지지를 얻은 응오딘지엠의 승리였다. 개표결과 찬성이 572만 1,735표, 반대가 63,017표 그리고 무효표가 44,105표였다. 물론 이 투표 자체는 부정선거였다.[11] 이렇게 해서 응오딘지엠은 1955년 10월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이른바 남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1956년 4월에는 호아하오 지도자 바 끌의 마지막 무력 저항을 분쇄함으로써 ‘봉건주의의 종언’을 선언했다.

응오딘지엠은 정권 초기 바오다이 축출과 빈쑤옌 세력 제거 밑 통합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월남한 80만 난민의 정착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응오딘지엠 정권이 사회안정적이고 대중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점차 미국의 후원을 대대적으로 받아가며 미제국주의의 반공의 보루로써 역할을 하게 되며 나타났다. 토지개혁에 있어서도 베트남 인구의 극소수(10%미만)인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토지를 할당했으며, 불교에 대한 탄압도 가속화 했다. 또한 응오딘지엠은 가족 정치를 실행했다. 응오딘지엠의 동생 응오딘누는 남베트남의 수석 보좌관으로, 응오딘누의 부인 마담누는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 마담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 디엠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그리고 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 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12]

이러한 가족정치 그리고 민중에 대한 억압정치와 더불어 응오딘지엠의 가장 큰 과오는 항불항일 투쟁을 했던 베트민에 대한 억압조치였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베트민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구금했다. 마이클 매클리어는 책에서 응오딘지엠의 억압 조치와 응오딘 누가 이끄는 비밀경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들은 제멋대로 체포했고, 집단수용소에서는 아무런 법적인 보호 조치도 받을 수 없었다. 기간도 정해지지 않은 채 감금했다.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암살도 서슴지 않았다. 억압은 단순히 다른 정당의 대표나 대변인처럼 항거하는 보통사람들은 탄압·투옥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12~113

베트남 역사를 연구한 알렉산더 캔드릭은 <미국의 갈등(American The Wound Within)>라는 책에서 응오딘지엠 집권 기간동안 응오딘누는 75,000명을 살해하고 5만 명을 투옥했다고 썼다. 베트남의 쩐반쟈우(Tran Van Giau)는 “지엠이 집권하고 몇 년 사이에 874개의 감옥에 275,000명이 감금되었고, 53만 명이 고문으로, 23만 명이 지뢰나 폭탄에 의해 불구가 되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8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1956년 남베트남 정부는 최고 2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재교육센터에 감금되었다고 발표했고, 프랑스 학자 드빌레는 그 수치를 최소 5만 명이라고 추정했었다. 일부 수치에 과장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응오딘지엠 정권 시기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무자비한 숙청과 탄압을 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13]

이런 조치들이 계속되면서 1959년부터 베트민 잔존 세력들과 일부 민중들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무장투쟁에 나섰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사회적 조치들을 성공적으로 마친 호치민의 북베트남 지도부는 “전체회의 결정과 더불어 주의 깊게 지켜보며 기다리던 자세를 버리고 남부 통일에 제일 높은 우선 순위”를 부여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난 남부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민중들에 대한 지원이었지, 공식적인 침략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억압적이고 반민중적인 조치가 계속되자 남베트남에 남았던 잔존 베트민 세력과 민중들은 하나의 조직으로써 뭉치게 되는데 그게 바로 1960년 12월 20일에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었다.

재평가?[편집 | 원본 편집]

미국의 괴뢰론은 베트콩의 선전인가?[편집 | 원본 편집]

총론[편집 | 원본 편집]

참고문헌[편집 | 원본 편집]

각주[편집 | 원본 편집]

  1. 아이러니 하게도 응오딘지엠 20세기 최고의 명장의 자리에 올려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보 응우옌 잡 장군과 고향이 같다.
  2. The Two Viet-Nams, Bernard Fall, 1963, Praeger Publisher p.239를 참조
  3. 호치민 평전 p.520
  4. 예를 들면 버마의 아웅산이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또한 일본을 해방군으로 맞이했었다. 물론 그런 환상이 깨지기 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약간이라도 응오딘지엠을 변호하자면, 디엠이 일본과의 협력을 선택한 것도 그러한 흐름으로 볼 수 있을 수도 있다.
  5. 베트남 근현대사(2016년 개정판) p.146
  6. 다만 여기서 알아둬야 할 점은 베트남에 있던 가톨릭 세력들이 죄다 베트민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1941년에 창설된 베트민은 좌우를 망라한 단체였고, 민족주의적 색체를 보다 많이 드러내 보이기도 했었다. 또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항불투쟁에서의 가톨릭 세력의 도움도 분명히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 공산주의 세력들이 무조건적으로 종교에 적대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7.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00
  8. 호치민 평전 p.689
  9. 윤충로, 「베트남 공화국 응오 딘 지엠 정권 지배이데올로기의 특성과 한계」
  10.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6~447
  11.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 형성사 p.293
  12.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11
  13.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6을 참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