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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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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이름 이승만
출생일 1875년 3월 26일
사망일 1965년 7월 19일
직업 독립운동가, 정치인
소속 독립촉성중앙국민회(1945~1951)->자유당(1952~1960)
종교 감리교
비고 폭력배, 사기꾼, 독재자, 학살자, 무능력자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 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주주의유신공화국의 최초의 독재자이다. 그리고 무능력자, 학살자이다.

해방이 되자 백범 김구를 암살한 것으로 보이며 반민특위를 박살내고 악질 친일파들을 모조리 살려줬다. 6.25 때는 국민들에게 사기치고 혼자 한강다리 터트리고 줄행랑을 쳤다.

이후 발췌 개헌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등을 자행하다가 4.19 혁명이 일어나자 주특기를 살려서 본래 살던 하와이로 도주하였다.

이 대통령은 여순사건 진압 직후인 11월 5일 “남녀 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진압 후 정부 조치는 매우 가혹했다. 여수와 순천에서는 각각 수천 명을 학교 건물 등에 모이게 하고 심사를 했던바, 가담자 또는 협력자로 지목이 되면 그 옆의 즉결처분장에서 총살되거나 타살되었다. 특히 여수에서 5연대 장교 김종원은 즉결참수로 악명이 높았다. 여수 만성리굴 부근에서는 1949년 1월 13일 종산국민학교에서 끌려온 125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미군 G-2보고서에는 11월 29일까지 1,700명이 재판을 받아 866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1]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틀리면 무조건 도망부터 치는게 특징이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하와이에서도 열심히 사기질과 협박질, 마피아짓을 했다. 어찌보면 대한민국을 낚은 희대의 지능범이라고 볼 수 있다.

생애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에 있는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천자문을 때었을 만큼 머리가 좋았던 이승만은 13살 때부터 총 11차례나 과거에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11차례나 과거 시험에 응시했음에도 떨어졌다. 1891년 16살의 나이에 박 씨와 결혼을 하게 된 이승만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더 이상 과거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자, 신학문에 눈을 돌렸고, 그 과정에서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이승만은 189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영어 공부를 하며 역사, 지리, 수학 성경 등의 과목도 이수했다. 당시 그는 미국의 독립 전쟁과 남북전쟁사에 매혹되었고, 소위 미국이 말하는 정치적 자유와 기독교 국가의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배재학당에 있을 당시 서재필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그것 또한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영어연설을 하며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1898년 협성회보를 창간하여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그걸 매일신문으로 개제하여 발간한 이승만은 서재필과 같은 계몽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개화운동을 전개했지만,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다. 이승만 또한 체포되었고,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는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특사로 출옥했다. 대략 5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했던 박용만과 의형제를 맺었고, 죄수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으며,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었다. 개화운동과 감옥생활에서 친미성향을 가지게 된 그는 출옥 이후 미국에 가기로 결심했고,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하버드 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프린스턴 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될 우드로 윌슨이 그의 지도 교수였다.

여기까지의 이승만의 생애를 보면 그는 그냥 개혁적인 사람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악행과 치졸함 그리고 배신행위는 미국 유학부터 시작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미제국주의자 테어도어 루즈벨트의 친구인 스티븐슨은 일본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찬양했고, 일제의 조선 지배를 합리화 했다. 1908년 센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 열사가 친일파이자 미제국주의자인 스티븐슨을 저격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재미한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기독교적인 이유를 들어 “살인마를 변호할 수 없다”며 변호를 거부했었다. 그는 1913년 자신의 의형제인 박용만의 도움을 받아 하와이에 정착했다. 그의 의형제인 박용만은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이라는 무장투쟁 조직을 만들 정도로 무장투쟁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반면에 그는 하와이에 있는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을 맡아 교포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였는데, 놀랍게도 그가 가르친 교육과정에는 반일을 가르치는 내용이 없었다. 오히려 친일에 가까운 내용들이 많았다. 1916뇬 이승만이 호놀룰루 스타블러딘 신문에서 쓴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 신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말길 바란다.”

심지어 그는 하와이에 정착하기 전인 1912년 워싱턴 포스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한일합방후 3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

놀랍게도 이런 주장은 ‘식민지근대화론’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주장이었다. 박용만의 도움으로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정착한 이후 박용만과 대립했다. 한때 자신의 의형제였던, 박용만의 무장투쟁 노선을 비판하는가 하면, 1918년 하와이 법원에선 인간으로썬 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했다. 1917년 그가 이끌던 국민회의 회계처리에 대해 문제를 삼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 세력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재정문제에 문제를 제기한 국민회 대위원들을 ‘폭동죄’를 적용하여 미국 경찰에게 고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재판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행동을 하며 일본군함 이즈모가 홀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이승만의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영미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1919년에 파리강회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 참석이 좌절되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는데, 그게 바로 ‘위임통치 청원’이다. 즉 조선의 문제를 미국에게 맡기겠다는 얘기로써 미국이 대신해서 통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반발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1919년에 만들어진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놀랍게도 이승만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1920년 상하이에 갔는데, 1년 6개월 기간 동안 임시정부와의 갈등만을 조장하다, 임시정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자신의 조직을 확장시켜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했고, 안창호와 대립했다. 결국 이승만은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했고, 그가 만들어 놓은 혼란은 백범 김구가 잠재울 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전형적인 친미제국주의자 답게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모습을 미국인들에게 보였고, 사회주의 계열과는 절대 손을 잡지 않으려 했다.

이승만이 망쳐놓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킨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백범 김구였다. 백범 김구는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통해 항일의 의지를 보여줬다.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 또한 이를 극찬할 정도였다. 심지어 조선공산당을 이끌며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박헌영도 개인적인 테러 행위를 반대하는 것과는 별개로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존경하는 우리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달랐다. 이승만은 임정의 백범 김구에게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며 주제넘게 평가 절하했다. 그와는 별개로 이승만은 1934년 자신보다 25살이나 어린 오스트리아계 미국인인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며, 국제 정세는 다시 암울해졌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40년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군사 동맹을 체결했고, 더 나아가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장악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던 1941년 6월 이승만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주미외교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그가 집필한 ‘일본 내막기’는 현실이 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를 기습 공격하면서 미국과 일본 간의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정세판단이 빨랐던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 초기에 보였던 행동과는 달리 엄청난 반일 투사가 되었으며, 1942년에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라는 방송을 통해 국제사회의 소식을 알리는 방송활동을 한 것이다. 거기다 미국의 OSS(Office Strategic Service)가 중경에 있는 백범의 임시정부와 연합작전을 하려고 하자 그의 요청을 받아 무장투쟁을 준비한답시고, 대략 50명 정도의 한인들을 OSS에 투입시켜 훈련받게 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행위들은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고, 기존에 보였던 행위와는 모순된 행위였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이 들어왔고, 이남에는 미군이 상륙했다. 이와 더불어 이승만 또한 1945년 10월 더글라스 맥아더가 보내준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해방 후 한반도 이남에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준 세력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 공산당 재건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총재자리에 올라갔다. 그는 미군정의 지원을 받았고, 보수우익 세력들과 친일파들이 중심이 된 한민당과 결탁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 내용이 왜곡 되어 전달되면서 신탁통치 반대투쟁이 격해졌고, 왜곡보도 1946년 초 삼상회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이 되면서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지지’를 표명하자, 이승만은 김구와 손잡고, 반탁투쟁에 나섰다. 그 반탁투쟁을 통해 친일파 세력들은 기사회생 할 수 있었고, 이승만은 이들을 이용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친일파 출신들이 대다수인 우익 경찰과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세력들은 대중들을 향해 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개최가 어떠한 합의점을 보지 못한 채 끝나자, 그해 6월 이승만은 전라북도 정읍에 내려가 단독정부 수립을 획책하는 ‘정읍 발언’을 했다. 이후 미군정이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자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좌우합작운동은 1947년 7월 19일 몽양 여운형이 암상 당하면서 실패로 끝났고, 이승만은 친일세력과 더불어 단독 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이후 미국은 한반도 정부 수립 문제를 UN으로 이관했고, 1948년 5월 대한민국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진행되었다. 단독 정부 수립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주와 여순(여수-순천)에선 무장 항쟁이 일어났고, 이승만과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단 그리고 군대를 파견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제주4.3 항쟁에서 최소 3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이승만과 미군정에 의해 학살당했고, 여순 항쟁에서도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1948년 8월 15일에 탄생한 대한민국은 그렇게 탄생했고, 대통령은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반도 이북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대한민국 내에서 1949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반민특위’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일당은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하면서 반민특위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했고, 이승만 밑에 있던 친일파 출신인 장경근이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체했다. 그 바람에 대한민국에서 처벌받은 친일파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심지어 고문왕으로 유명한 노덕술 같은 인물도 처벌받지 않았고, 그는 이승만으로 부터 애국자라는 얘기까지 들으며 출세할 수 있었다.

1948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부터 그가 정권에서 물러날 때 까지 외치던 통일 방법이 있다. 그게 바로 ‘북진통일’이다. 한국전쟁이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기 전까지 이승만은 미국에게 전쟁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했고, 북진통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킬 것을 염려한 미국은 그의 요청을 거부했고, 한국전쟁은 북한이 먼저 일으키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에게 거짓 방송을 해놓고, 한강 다리를 폭파했으며 대전과 부산으로 도망쳤다. 이승만이 한 거짓 방송 때문에 서울 시민들은 발목이 묶였고, 서울은 3일 만에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 한국전쟁 초기 대략 250대의 T-34 탱크를 동원한 북한군의 진격은 한국군을 계속 후퇴하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 과정에서 잠재적인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을 들어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데 그게 바로 국민 보도연맹 학살이다.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가 저지른 최악의 민간인 학살인 국민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최소 30만 명 이상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또한 이승만은 전쟁 초기 대한민국의 전시 작전권을 미국에게 넘겼고, 대한민국의 작전권은 아직도 미국이 가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참전하는 전쟁으로 변하면서 유엔군과 국군은 북진을 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까지 수복하였으며, 그해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서울을 다시 탈환한 이승만 정부는 자신이 버렸던 서울 시민들이 인민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를 들어 다시 학살했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익 청년 단체들의 학살은 유엔군과 국군이 장악한 곳에서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다시 밀렸다가, 서울을 재탈환 하면서 미국과 중국 그리고 UN은 휴전을 논의하게 되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은 또 다른 만행을 저지르는데, 그게 바로 국민 방위군 사건이다. 국민 방위군을 만들었던 이승만은 방산비리로 인하여 자국 군인 10만 명을 아사시켰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까지 이승만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최소 30만에서 10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학살했다.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독재정치의 길을 걸었다. 1954년에는 ‘사사오입’이라는 전대미문의 억지로 개헌안을 통과시켜 3선의 길을 마련했고, 자신의 정당인 자유당을 이용하여 독재정치를 일삼았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이 씨인 이기붕을 내세워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이기붕이 대한민국에서 한자리 차지하도록 뒤에서 힘을 썼다. 1958년 이승만은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는 짓을 자신의 정적에게 했다. 지난 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과 적잖은 표차를 보였던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법살인 하였다. 1960년 나이가 86세가 된 이승만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부정선거가 일어나자, 학생들과 시민들은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이승만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위에 나선 학생을 빨갱이로 몰아 허위자백을 받아냈고, 민중을 향해 실탄을 발포하기 까지 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 까지 수백 명의 민간인이 죽고 수천 명의 민간인이 다쳤다.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원하던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휘하의 정치깡패들이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는 사건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1960년 부정선거로 인하여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승만은 주한 미대사인 매카나기의 말을 들어 하야했고, 그는 하와이로 도망쳤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이 무너진 이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 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자 이승만은 대한민국에 귀국하려 했으나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그러던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은 하와이 홀놀룰루에서 9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친일파와의 유착관계

이승만은 환국 후에 친일파들이 제공하는 정치자금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그 때문에 친일파들의 요구를 일정하게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반민법’대로 친일파를 처벌할 수가 없었다.[2]

  •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하면서부터 친일파 재산가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고, 친일경찰을 옹호하는 등 친일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3]

  •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만의 편집증 가운데 절대권력에 대한, ‘합리성’이 과도하게 배제된 집착은 그의 권력 붕괴를 초래했다. 그는 부통령이나 국무총리를 제도적 장식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장관도 자신의 ‘분부’를 받드는 존재로 생각해 1952년 8·5정부통령 선거를 파행적으로 치렀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 했으며, 친일파 맹종자들로 국무위원과 자유당 간부를 삼았다.[4]

  • 네이버 지식백과.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부터 활동을 개시해 박흥식·이종형·최린·최남선·이광수·김연수 등을 구속했다. 이승만의 분노는 악질 친일파의 대명사 격인 노덕술 수도경찰청 수사과장과 최연 등이 체포되자 폭발했다.[5]

  • 네이버 지식백과.

친일파는 이승만의 정권장악과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또 이를 위하여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켰다.[6]

  • 네이버 지식백과.

친일파 등용은 이승만 정권 말기로 갈수록 심해졌다. 그들이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자에게 맹종한다는 것을 이승만은 잘 알고 있었다. 1954년 5·20선거에서 친일파들이 대거 자유당 간부가 되는 것은 개헌 및 독재와 연관이 있었다.[7]

  •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만 후기체제는 친일파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5·20총선을 계기로 친일파들이 다수 등장해 이승만-이기붕체제를 떠받히는 자유당의 핵심 간부가 되었다. 이들은 대개가 이승만 정권 전반기에 관료였다. 이 점에서 이승만 정권 후기는 친일파 관료의 집권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영역 내에서 ‘소이승만·소이기붕’ 왕국을 건설했다. 친일파들은 이 시기에 행정부에서도 강력한 지위를 차지했다.[8]

  • 네이버 지식백과.

‘생각이 있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비판은 일제하 가장 큰 협력자들이 정부 고위관료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아직도 한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백화점 사장인 박흥식은 미군정 교육부장인 유억겸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들은 일본을 위해 비행기를 만든 사람들이며, 김연수와 신영욱이 또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적산 은행과 기업들은 극우정치 그룹에 많은 돈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다 알려져 있는 비밀이다. 일제 시기 가장 큰 친일파들이 이러한 극우정치그룹들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김성수, 이승만을 지원하고 있다.[9]

  • 아서 번스 ‘미군정에 대한 생각 있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비판’(1947년 9월25일자. 버치문서 박스 1).

일제에 부역했던 자산가들 중심

'경제보국회' 10명 2천만원 대출

이 중 1천만원 이승만에게 제공

부일행위 무마하려는 '보험료' 성격

백미 1천석 살 수 있는 거금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정부였던 것이다.

횡령의 달인

버치 보고서에 이승만이 얼마나 횡령의 달인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승만의 재정적인 횡령과 관련이 있다. 공산주의와의 선전전을 위한 돈이 필요하다는 전제하에서 미군정은 이승만에게 2500만엔을 주었다. (민주의원에게 주었고 민주의원에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전달했다.)

이 돈은 반공 선전전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가 받은 돈은 한국에서 불법적으로 (달러로) 교환하여 미국으로 송금되었고, 선교사 재단이 이용할 수 있는 미국의 선교사 자금이 이승만을 위한 돈으로 사용되었다. 이승만은 고 러치 장군이 이러한 과정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을 때 이를 거절했고, 그때 나는 공식적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국의 경제협조처(ECA) 행정관이었던 번스에 의해 이승만과 그의 친구들의 음모가 밝혀지기도 했다. 그들은 한국을 위한 미국의 부흥원조 자금 중 4000만달러를 해외거주 교포들이 채권으로 구입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미국으로 빼돌렸다.

[10]

민간인 학살

1945년 8.15 해방 이후 한반도로 귀국한 이승만은 미군정에 힘입어 친일파 세력들을 규합하여 자신만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했다. 1948년 이승만은 단독정부수립 과정에서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제주도에서 최소 3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학살했고, 여순항쟁에선 대략 1만 명이 학살당했다.

이승만이 벌인 학살중 가장 광범위한 학살은 바로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인데, 이 학살만으로 최소 3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많게는 100만 까지도 잡는다. 정말 기가막힌 것은 그 보도연맹이라는 단체는 '전향'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만든 단체였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빨갱이로 의심하여 수십만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평가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

[11]

함께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