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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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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Kingdom of Great Joseon
조선어기.pngCoat of Arms of Joseon Korea.png
한반도.png
건국 1392년
멸망 1910년
수도 한양
대륙 아시아
면적 약 22만km2
인구 1400년대 573만 명

1500년대 900만 명

1600년대 1100만 명

1700년대 1350만 명

1800년대 1650만 명

지도자 왕→대군주→황제
체제 전제군주정
통화 푼, 냥→환, 전, 원
언어 중세 한국어
이념 유교
종교 유교
왕가 전주 이씨

조선(한자: 朝鮮)은 1392년에서 1910년까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전제 왕조였다.

역사

함경도 촌놈 출신 이성계최영이라는 명장을 요동 정벌 보냈더니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장맛비 좀 맞더니 노예 DNA 발동해서 대국을 어케 치냐고 역주행해서 회군하여 1388년에는 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세우더니, 1389년에는 창왕을 내쫓고 공양왕을 세우더니, 1392년에 끝내 공양왕마저 내쫓아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웠다. 이후 이성계 아들들이 왕 되겠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최종 승자는 태종 이방원이었다. 태종 아들로 왕위를 승계한 이가 청사에 길이 빛나는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노비 출신 장영실 시켜서 해시계, 측우기도 만들고, 농서도 편찬했다. 무엇보다도 한글을 만들었다. 조선 최고의 전성기였다. 세종 뒤를 이은 게 문종이었는데 오래 살지 못해서 그 아들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그런데 문종의 동생이었던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필하던 고명대신인 김종서를 때려 죽인 다음, 끝내 자기 조카를 쫓아내고 왕이 되었다. 수양대군은 왕이 되더니만 집현전을 없애지 않나, 세조 치세부터 조선이 흔들리지 시작한다.

중종 때, 조광조라는 유학자가 젊은 나이에 고위직에 올라서 개혁을 주도하다 기묘사화로 인해 사약 받고 죽었다. 그러한 조광조의 유교 사상을 계승하는 성리학 선비들, 즉, 사림파가 점차 힘을 키워 중앙 관계에 진출하고 사화로 몇 번 크게 피를 봤지만 최종적으로 승리해서 조선 정치를 이끌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이라는 나라가 적폐가 쌓이기 시작했다. 반상 구분은 엄격해지고 여성 권리는 추락하며 과학기술은 퇴보하고 군사력은 약해졌다. 전인구 10%쯤이 중국의 철학서와 역사에 빠삭하게 된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다. 16세기 전반 퇴계 이황, 율곡 이이의 등장으로 조선 성리학 수준은 크게 발전했다. 이황을 따르는 동인과, 이이를 따르는 서인으로 조선 최초의 붕당이 생기며 당쟁이 시작된 것이 이때다. 그때 일본은 100년 동안 치열한 내전을 벌이며 조총이라는 서양의 최신 무기까지 도입하며 일취월장한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조선의 양반들은 그저 민생에 하등 도움도 안 되는 탁상공론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니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을 이룬 일본이 조선에 대해 전면적인 침략을 감행했을 때 속절없이 털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임진왜란). 그래도 명군의 구원과 의병의 분전, 무엇보다도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대활약으로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렇게 크게 한 번 데였으면 정신 좀 차리고 부국강병에 힘써야 할 텐데, 조선의 지배 세력은 여전히 공자왈 맹자왈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쟁 전보다 오히려 더 맛이 갔다. 조선의 지배 세력은 명나라의 구원으로 나라가 되살아났다는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주워 섬기며, 대명 사대에 더더욱 목숨을 걸었고, 새로히 일어나는 강자인 은 괄시했다. 그런 조선에서 그나마 현실 감각이 있었던 게 당시 왕이었던 광해군이었는데 결국은 서인에 의해 쫓겨났고 인조가 즉위한다. 그 결과 청의 침략으로 벌어진 두 번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했고, 그 가운데 두 번째인 병자호란에서는 국왕인 인조가 청 황제 홍타이지 앞에서 삼궤구고두를 행하는 삼전도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청나라 수도 심양에 볼모로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세자는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고 깨인 사람이 되어 귀국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현세자 이왕은 젊은 나이에 죽어서 왕이 되지 못했다. 소현세자 대신 왕위에 오른 효종이 오랑캐들한테 당한 치욕을 복수하겠다며 북벌을 외쳤다. 현종 연간에 경술년(1670)과 신해년(1671) 두 해에 걸쳐 대기근이 일어나 100만 명이 죽었다(경신대기근). 17세기 내내 신료들은 당파 싸움이나 해대었고 조선은 그야말로 동아병부(東亞病夫)가 되었다. 이 시기의 슈퍼 스타가 바로 우암 송시열.

그러다 18세기 들어 영조정조가 왕위에 올라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펼치며 중흥기를 맞게 된다. 이 무렵 상업이 활성화되어서 전국에 5일장이 형성되고 화폐도 본격적으로 통용되었다. 문화도 번성해서 김홍도, 신윤복 같은 훌륭한 화가도 나오고 한글 소설이니 판소리니 하는 서민 문화도 꽃피웠다. 정조는 왕권 강화를 이루고자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하고 근신들로 이뤄진 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설립했다. 수원에 화성을 쌓아서 천도할 계획을 세우기도했다.

19세기는 조선이 세도정치+삼정문란으로 더욱 피폐해진 시기라 볼 수 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며 적폐 유학자들의 본거지인 서원들도 철폐하고, 양반한테 병역 부과해서 호포제도 시행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이 이뤄졌다. 하지만 서양 문물 도입 같은 건 끝끝내 외면하고 말았다. 천주교를 탄압했고, 각각 프랑스, 미국과 싸운 병인양요신미양요를 치른 다음, 전국에 "서양 오랑캐랑 잘 지내자고 하는 건 매국이다"라고 하는 척화비를 세웠다. 고종이 대원군을 쫓아내고 친정을 시작했지만 제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은 외척인 민씨 일가에 휘둘리게 되었다. 그 시기에 쇄국을 풀고 개항을 하고 서양 국가들과 수교도 이뤄졌지만 제대로 된 근대적 산업 기반 및 군대를 만드는 본격적인 근대화는 지지부진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호시탐탐 한반도를 먹어삼키려고 애썼는데 최후의 승리자는 일본이었다. 그걸 가쓰라-테프트 밀약으로 보장해 준 게 미국이었다. 1905년에 을사늑약으로 일본 제국이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함으로써 보호국화되었고, 1910년 한일 합방조약으로 멸망했다.

평가

왜 하필이면 노비나 여성들의 권리를 추락시키고 유교적 도그마티즘을 공고화시킨 조선초기를 고려말에 비해 "진보"된 "근세"로 보고, 거기에다가 "민본주의" 등등의 미사여구를 가미시켜야 할까요? 조선 역사의 흐름은 당연히 변모를 거듭하고 당연히 전진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 모습이 예컨대 서구의 동시대의 근대화와 많이 다르다고 해서 왜 그 다름을 꼭 은폐시키고 서구와 같은 "근대"를 "발견"하려고 애써야 하는지...모르겠습니다. 왜 16세기 동아시아 치고 대단히 보수적이며 관념론적인 사상가인 퇴계이황이 현실 이상으로 확대해석되고 속된 말로 "뻥튀기"돼야 하는지, 왜 중국 상대의 3대를 이상적인 치세로 생각했던 "실학자"들을 서구의 계몽사상가와 동일시시켜야 하는지, 왜 3대 정치 이상화 연장선상의 다산의 천자추대론을 "민주주의 사상"으로 미화시켜야 하는지...저는 이해 못하고 그런 식의 '국학'에 대해서 강한 문제의식을 느낄 뿐입니다.

박노자(오슬로대학교·한국학)

전대인 고려에 비해 귀족사회적 성격은 분명 약화되었을지 몰라도 노비제 확대 측면에서는 신분제가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엄격한 명분론이었고, 그 '명분'에는 엄연히 , 의 명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각에서는 '유교적 민본주의'을 운운하며 마치 조선의 지배층이 신분제에 부정적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하지만, 조선 중·후기 사대부들에게 그야말로 만세(萬歲)의 사표(師表)였던 조광조"대개 귀천(貴賤)의 분수는 침범할 수 없고 적서(嫡庶)의 윤리는 엄하여야 한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조선의 지배층이 진정으로 신분제를 완전히 없애려고 노력했다면,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마자는 아니더라도 한 200년쯤 지나서는 신분제가 법제적으로는 완전히 폐지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런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무렵에 벌어진 일은 무려 인구의 30~40%를 노비가 차지하는 노비제의 절정이었다.

성리학이 왜곡되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성리학은 그런 학문이었다. 성리학의 교조인 주자(朱子)부터 "이치는 하나지만 대상에 따라 다르게 적용한다"는 리일분수(理一分殊)의 논리로 인(仁)과 같은 보편 윤리를 차등적으로 행하는 것을 정당화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범주에 신분의 귀천을 포함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리학의 신분 차별 사상은 조선에 들어 와서 퇴계 이황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1] "조선 왕조가 유교적 통치로써 사회 안정을 이뤄냈다"고 했을 때 그 방법론은 크게 문치주의, 중앙집권, 그리고 신분제에 의한 것이었다. 앞의 둘은 강조하면서 후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고 아예 인정조차 하지 않는 것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식의 태도에 불과하다. 조선에서 신분제가 폐지된 것은 서양에서 민주·공화 사상이 들어오고 난 다음인 1894년의 갑오개혁 때였으니, 백 번 양보해서 성리학이 신분제를 강화한 것은 아니더라도 완화·해체를 이끌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조선의 형법은 기본적으로 양반을 제외한 ··천인상천(常賤)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부류로 취급을 했는데, 이는 노비들이 일반 양인과 비교했을 때 한없이 비천한 존재로 차별받는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을 겪지 않았다는 증거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가 권력이 일반 양인을 노비들과 별 다를 바 없이 취급했다는 증거도 된다. 양인 계층 내부에서도 백정과 같은 신량역천(身良役賤) 계층은 끔찍한 차별과 학대에 시달렸다.[2][3] 한국 고·중세사 사료 어디를 봐도 조선 후기 백정과 같이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는 불가촉적인(untouchable) 집단의 존재를 확인하기 힘들다.[4]

각주

  1. 이승환, 「리일분수 담론의 사회 현실적 의미과 기능 - 성리학의 신분제 정당화 문제를 중심으로」, 철학연구 57권, 2018.
  2. "한 마디로, 백정은 조선사회에서 가장 낮은 신분집단이었다. 시대에 따라 호칭이 달라졌고, 또 호칭도 직업에 따라 분화되었지만 그들에 대한 대우는 여전히 다른 천민들보다도 더 낮았다. 따라서 그들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사회에서 체제 속으로 편입될 수 없었던 서얼이나 소작농민, 심지어 노비보다도 더 낮은, 인간 축에 끼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받았던 사회적 차별대우를 살펴보자면, 1) 생활상의 여러 가지 차별로, 가옥에 기와지붕이나, 의복에 명주의 사용은 허락되지 않았다. 머리에 笠子·綱巾·宕巾을 쓰는 일, 가죽신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외출할 때는 봉두난발에 荒竹으로 짠 平涼子(패랭이)를 써서 한 눈에 신분을 알도록 했다. 또한 일반인 앞에서 끽연·음주·연회 등도 금지 당했다. 2) 관혼상제에 있어서의 차별로, 장례식에 상여 사용이 금지되었고 묘지도 일반민과 구분했다. 혼례에 馬·輿 등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결발(結髮)을 인정치 않았고 가묘(家廟) 등도 절대 불허하였다. 3) 교육상의 차별로 일반민과 동등하게 허락되지 않았고, 입학을 해도 배척당했다. 4) 교제상의 차별로, 일반민에 대해서 최경례(最敬禮)를 해야만 했고 공공집회에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일반민의 집을 방문하는 일에도 제한을 받았다. 5) 성명의 제한으로, 仁·義·忠·孝 등의 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고 특정한 姓을 강요당했다.(姓을 갖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외에도 거주지역이 제한되어, 일반민과의 거주를 불허했으며, 교외 일정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하게 했다." 신종한, 「근대 신분제도의 변동과 일상생활의 재편」, 동양학 47호, 2010.
  3. "백정은 특정한 성격을 가진 ‘버림받은 집단’이라는 인식 아래 자행된 사회적 차별과 억압, 배제는 관습에 의해서 일상생활이나 사회관계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또 강화되어갔다. 유교 이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거지가 결정되는 조선 사회에서 백정들은 기본적으로 공적 세계뿐만 아니라 사적 관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양민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복종하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갖추어야 할 공손한 예의와 행동거지는 그들의 기본적인 자세였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관습으로 굳어져서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백정들의 삶을 지배했다. 예를 들어, 백정은 좋은 의미를 가진 글자로 이름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개 천한 이름을 가졌다. 차별은 일상생활에서의 대화나 옷차림, 가옥 등 모든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일반 백성들과 대화하면서, 백정들은 상대방의 나이에 관계없이 존댓말을 썼지만, 일반인들은 반말을 하였다. 백정 남성들은 갓 대신에 굴욕적인 패랭이를 착용하고, 여성의 경우에는 비녀를 꽂는 대신에 둘레머리를 해야 했다. 백정들은 가죽신 만드는 일을 했지만 신을 수 없었고, 경제적 여유가 있어도 가옥에 기와를 올리거나 치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백정들은 백정끼리 결혼하였고, 양민들과 묘 자리를 같이 쓸 수 없었다. 상민층이나 여자 종 등 비백정 집단과 혼인하는 경우가 있지만, 상대는 대개 낮은 신분 집단이었다." 김중섭, 「조선 전기 백정 정책과 사회적 지위」, 조선시대사학보 68호, 2014.
  4. 조선 초기에도 양반, 양인층은 백정의 원형인 재인, 화척(양수척) 등의 집단에 대해 거주 구역을 분리시키고 혼인도 꺼리는 등 차별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근대 들어 형평사 운동이 일어나며 고발된 바와 같은 다양한 비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기록은 고려 때는 물론 조선 초기의 사료에도 없다. 조선 전, 중기 사회에서 신백정에 대한 인식은 한 마디로 '깡패' 정도였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들에 대해 정교한 법적, 관습적 억압 체제가 아직 작동하기 전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