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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악 (토론기여)

[워커스 사전] INTER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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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노동자는 코로나 시대가 찾아낸 사람들이다. 그림자 노동, 밑바닥 노동, 하청·특고·불안정·비정규직 등으로 불리던 노동자들은 ‘필수노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우연한 계기였다. 노동자들이 먼저 요구한 말은 아니다. ‘필수노동자(essential workers)’는 미국 주정부들이 보건의료 ·식료품·공공운수 등 코로나19 상황에서도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산업의 노동자에게 계속 업무를 수행토록 하는 행정명령에서 나온 말이다. 영국에서는 같은 의미로 ‘핵심 노동자(key worker)’라고 부른다. 한국 정부는 ‘필수노동자 보호를 위한 관계부처 태스크 포스’를 출범시키면서 이 말을 차용했다.

한국에서 공식화된 정의는 ‘국민의 생명·안전과 사회기능 유지를 위해 핵심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면노동자’다. 이러한 정의는 여전히 필수노동자를 특수상황에서만 요구되는 제한적이고 임시적인 노동직군으로 위치시킨다. 언택트 시대에 필요한 컨택트 노동자 정도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이 자본의 위기관리 관점에서, 재난이나 위급상황에서 복구에 필요한 ‘필수 장비’처럼 노동자를 징발하고 투입하는 개념으로 시작됐다 해도, 이 노동자들의 분투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공식화하려는 정의와 사회화하는 정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고, 이 간극이야말로 우리의 개념투쟁이 필요한 장이기도 하다.

필수노동자라는 말은 소위 탈노동 시대에도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노동자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리고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전통적인 임노동자와 일치하지 않는 ‘노동 외부의 노동자’를 노동의 중심으로 불러들인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낙오와 배제의 통치로 양산한 대상화되고 주변화된 하층 노동의 개념을 재규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본질적인’, ‘필수적인’의 의미를 자본의 관점이 아닌 노동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때는 전혀 다른 의미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노동을 떠받치는 노동으로서의 필수노동이며, 기간산업에 대응하는 기층 노동의 의미를 갖는다. 즉 모든 노동은 ‘필수노동’ 위에서만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노동 아래의 노동’은 사회의 기초이고, 모든 노동의 인프라다. 그 반대편에 –또는 위쪽에-체제의 관리계급으로 흡수된 고임금 노동 직군이 ‘노동 위의 노동’으로, ‘상층부 노동자’로 등장한다. 이와 같은 개념화는 사회 계급의 재구성과 계급 연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또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은 돌봄 노동이 필수노동의 핵심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필수노동에 포함된 종류를 살펴보면, ‘육아, 돌봄, 요양, 급식, 청소’ 등 ‘돌봄’과 관련된 노동과, ‘택배, 운송, 화물, 콜센터, 물류센터’ 등 물류·운송과 관련된 노동이 크게 두 축을 이룬다. 사회화된 돌봄 노동과 글로벌 자본주의 이후에 핵심 부문으로 부상한 물류 부문 노동이 필수노동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동안 노동 시장 내의 위계에서 가장 하위에 위치하며 가치평가 또한 가장 낮았던 직군이다. 돌봄 노동은 대부분 불안정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고, 화물 운송 노동자의 93%는 ‘지입차주’라 불리는 특수고용 형태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서 택배기사인 리키와 방문 요양사인 그의 아내 애바는 필수노동자의 현실을 대표한다. 자본이 감추려 했으나 코로나 시대가 드러낸 이 ‘필수노동자’의 필요불가결함은 노동가치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평가와 협약을 요청한다. 사회의 근간이 되는 노동에 대해서는, 임금과 직업안정성 및 노동권에 대한 보장 또한 필수적이어야 한다. 토대가 흔들리면 사회 전체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필수적 노동에는 필수적 보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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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필수적 보장의 첫 번째는 노동권의 보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필수노동자를 사회적으로 정의할 때, 임시적 존재를 우선적 존재로, 제한적 조치를 보편적 권리로 주장하고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정부나 지자체에서 추진하는 지원 대책은 이런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위험수당 같은 금전적 보상이나 복리후생 차원의 처우개선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필수노동자에 대한 지원 조례 제정을 가장 먼저 추진한 성동구 사례를 보면, ‘재난 시 사회기능 유지를 위해 노동을 지속해야 하는 업종종사자’를 필수노동자로 규정하고 위험수당과 처우개선비 등을 지원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물론 마스크와 소독제도 필요하고 보험도 필요하다. 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필수노동자를 ‘재난 시의 노동자’라고 규정하는 관점은 여전히 이 노동자들의 일을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필요로 한정하는 것이다. 또한, 전시 징발 성격의 위기 대응 매뉴얼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위험수당은 전형적인 시장주의적 보상책이다. 인력시장에서도 위험하고 힘든 일에는 보수가 더 붙는 법이다. 이것은 가장 안정적인 노동이어야 할 필수노동에서 ‘불안정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이케다 미노루의 《후쿠시마 하청노동 일지》(두번째 테제, 2020)는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 일들이 어떻게 하청에 의해 수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피폭 지역에 들어가 방사능 오염을 제거하고 피해시설을 복구하는 일도 모두 하청노동자의 일이다. 이런 위험한 일에 투입된 노동자들은 모두 특별 위험수당을 받는다. 그러나 수당은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다. 사고 이전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에 비해 임금이 수십 배가 넘는 도쿄 전력의 정규직 관리자 중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이런 위험한 일을 맡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결정을 내리는 이들은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며, 질 수도 없다. 반면 돈이 필요해서든 어떤 이유로든 방사능 오염지구에 모여든 노동자들은 제염과 복구 작업을 하면서 현장을 파악하게 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점점 책임과 사명을 느낀다. 하지만 전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채로, 언제 일이 끝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일이라도 해고되는 처지는 마찬가지다. 이런 조건은 노동자들이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항거하지 못하도록 만들며,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과 타인을 구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불균형이 관리계급과 노동계급, 나아가 자본과 노동 간의 힘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조건이다.

노동자의 경험과 지식이 사회적으로 교환되고 축적되지 않기 때문에, 현장은 늘 사고위험이 상존하며 임시변통 식으로 될 수밖에 없다. 콘트롤 타워는 현장을 모르고, 현장에선 결정과정에 개입하거나 의견을 전달할 루트가 없다. 노동자에게서 권리와 자율성이 박탈될 때, 사회적 낭비와 위험요인은 계속 재생산된다. 결과적으로 비용의 효율성은 막대한 사회적 비효율을 낳고, 경제적 합리성은 정치적 비합리성을 초래한다. 그런데도 왜 국가와 자본은 필수노동을 가장 밑바닥의 노동으로 묶어두려는 것일까? 자본이 노동자들의 신분 안정이나 노동권보다 보수나 수당으로 협상을 하려는 것은 지배력 때문이다. 수당은 쉽게 철회될 수 있지만, 권리를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쉽게 자를 수 있다면 비용은 얼마든지 회수할 수 있지만, 권리가 생긴 노동자는 그럴 수 없다. 그러니 노동자의 입장에서 법을 만든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당 신설보다 직접고용을 통한 안정성과 노동권의 보장이다.

게다가 지금 말하는 필수노동은 재난 시에만 요구되는 임시적인 노동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사회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노동이다. 그것이 코로나19라는 재난상황을 통해 확인된 것뿐이다. 작금의 기후위기나 코로나 위기 또한 극복되거나 종료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항구화될 위기며 일상화될 재난이다. 이는 필수노동자 역시 앞으로 더욱더 필수적이고 중요한 노동자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4차산업혁명이나 뉴노멀, 그린뉴딜 등 전환 담론 어디에도 노동가치 재평가를 통한 노동전환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불평등 해소를 내세우는 그린뉴딜도 노동자의 해고문제를 산업전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 정도로 규정하고, 이 피해 노동자들을 어떻게 보호·지원·구제할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한다.

어떤 노동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는 그 일 자체에 내재돼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장의 수요 공급 원리나 희소성의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내는 결과다. 금융자본주의가 경쟁과 성과급이라는 능력주의 모델에 따라 금융업계와 지식산업계 종사자의 임금과 소득을 가파르게 상승시킬 때, 다른 사회에선 사회적 필요성과 공공적 기여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노동가치가 셈해지기도 한다. 공공에 복무하는 노동으로 버스 운전수와 대학교수 월급에 별 차이가 없는 노르웨이 같은 나라도 있고, 생명을 살리는 농민과 의사의 노동가치가 대등한 쿠바 같은 나라도 있다.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자본과 노동의 세력 관계와 계급투쟁을 보지 못하고 정치적 과정을 경제의 ‘섭리’로 설명하면, 노동가치에 대한 사회적 투쟁과 재협상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필수노동자’라는 개념은 우리가 노동의 가치투쟁과 사회적 재협상을 요구할 때 유리한 고지를 제공한다.

특히 필수노동의 대부분이 돌봄 노동이라는 점은 중요한 해석의 지점이다. 무상으로 전유되던 ‘집 안의 노동자’들이 경제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 밖으로 나오면서 사회화된 돌봄 노동은 비록 그것이 ‘시장의 영역’으로 흡수되었다고 해도, 노동 내부의 새로운 노동의 힘을 만들어냈다. 사랑이나 헌신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일이 ‘노동’이란 이름을 얻고, 아내나 엄마가 아니라 노동자란 이름을 얻게 되면, 사람들은 똑같은 일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여성들에게서 공짜로 전유해온 재생산노동을 저렴한 노동으로 시장에 불러낸 것은 자본이지만, 돌봄이 사회화될수록, 돌봄의 사회적 힘도 커진다.

이것은 자본이 돌봄 노동의 가치를 끊임없이 하락시키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류 운송 노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티머시 미첼은《탄소 민주주의 –화석연료 시대의 정치권력》(생각비행, 2017)에서 에너지 물류의 중심을 장악하는 것이 노동자들에게 정치적으로 어떤 힘을 주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1970년대 영국 대처 정부는 석탄 산업을 사양화하면서 광부노조를 완전히 분쇄해 궤멸시켰다. 석탄이 주요 에너지원인 이상 탄광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그 어느 분야보다 위력적일 수 있었다. 석탄이 석유로 넘어가면서 노동자들은 생산과 이동에서 통제권을 잃고 협상력을 상실한다. 유동성에 기반한 디지털-플랫폼 자본주의에서 석탄의 파업만큼 위험한 것은 로지스틱스, 물류의 마비다. 화물·운송·물류 노동자들의 파업은 유동성을 마비시킨다. 이에 대한 민중의 직관은 투쟁하는 지역 곳곳에서 나타난다. 노란조끼 시위대가 점거한 것은 ‘로터리’였고, 칠레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에서도 유통을 중단시키는 도로 점거가 중요한 전략이었다. 돌봄 노동은 자본엔 더욱 치명적인 위험이 된다. 마리아 로사 달라 코스따는 말했다. “지금까지 진정한 총파업은 없었다. 여자들이 부엌에 있었으므로” 돌봄이 멈추면 사회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 부엌이 멈추면 그때부터가 진짜 총파업이다.

이것은 왜 자본이 필수노동자를 저임금, 불안정, 비정규직 노동으로 고착시키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수노동자의 노동권이 향상될 때, 그들의 힘은 자본의 지배에 가장 위협적인 힘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들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반드시 억제하고 장악해야 하는 노동자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더욱더 이 ‘필수노동자’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대부분이 이 필수노동자 개념에 포괄된다. 그러나 정부가 준비하고 있는 필수노동자 보호법의 윤곽을 보면, ‘필수’ 노동자를 ‘안 필수적인’ 노동자와 구분하고, 필요한 노동자를 체로 걸러내는 방식이다. 시장의 유지에 필요한 노동자를 죽지 않을 만큼 보호해준다는 법이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의 경험은 자본이 노동을 조달하는 방식과 호명하는 방식에 모두 균열을 내고 있다. 필수노동자는 ‘취약노동자’ 같은 이름으로 약자화 되고 주변화됐던 노동자를, 자본이 고용과 책임 회피를 위해 ‘파트너’나 ‘개인영업자’ 등 기만적 용어로 부르면서 노동자가 아니라고 부정했던 ‘비(非)노동자’와 ‘반(半)노동자’를 ‘가장 중요한 노동자’의 의미로 탈바꿈시켰다. 필수노동자는 자본이 발명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노동자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정치적 용어로 재발명할 수 있다. 노동가치의 사회적 협약과 필수노동자의 필수적 노동기본권을 요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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