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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강간살인조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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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강간살인조작 사건
날짜 1972년 9월 30일 ~ 10월 10일
참여자 박정희, 김현옥
결과 무고한 여러 사람의 인생과 가정의 파탄
조사 국가가 고문, 협박, 증거조작 등을 통해 조작한 것으로 밝혀짐

춘천 강간살인조작 사건은 1972년에 일어난 국가에 의한 범죄 사건이다. 철저한 조작수사로 여러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 사건이다.[1]

사건전개

1972년 9월27일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에서 춘천경찰서 역전파출소장의 초등학교 2학년 9살 딸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파출소장 가족과 경찰관들, 주민들이 수색에 나섰고, 이틀 뒤인 29일 마을에 있는 춘천 측후소 뒤편 농로에서 싸늘하게 식은 나체 상태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결과, 피해 어린이는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됐다. 이 충격적인 이 사건은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사건해결의 실마리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9월 30일 박정희는 치안을 책임진 김현옥 내무장관에게 보고를 받은 뒤 크게 화를 내면서 ‘조속히 해결하라’고 지시했고 내무장관은 치안본부장(지금의 경찰청장)을 불러 ‘열흘 안에 범인을 잡으라’고 명령했다. 이에 10월10일 정확하게 열흘 만에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검거됐다. 그는 피해 어린이가 자주 찾던 동네 만화가게의 주인 정원섭(당시 38살)씨였다.[2]

각종 고문

경찰은 5일 동안[3] 비행기 태우기, 통닭구이 고문 등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고문 안 하면 뭘로 자백을 받아냅니까 그 사람들이이. 통닭이죠, 통닭. 통닭구이라고도 하고···.

당시 만화 가게 종업원: 5~6명이 정도가 나를 하나 가운데 놓고, 머리 때리고 잡고 흔들고··· 그 상황에서는 죽였다 그러면 죽인 거고, 봤다 그러면 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4]

각종 증거조작

계획적인 증거인멸 및 바꿔치기를 숨기기 위해서 증인마저 거짓진술을 하게 만들었다.

사건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까지 조작되었다.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빗과 연필이 갑자기 정씨의 것으로 둔갑하였다. 가게 여 종업원도 경찰의 가혹행위를 당한 뒤 “정씨의 빗이 맞다”고 진술했다. 종업원은 이후 자취를 감췄다.

당시 범행의 최초 목격자였던 이모씨는 1심 재판에서 “현장에서 목격한 연필은 누런 빛깔이었다”라고 진술했다가 위증혐의로 구속됐다. 구속상태에서 또다시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씨는 “파란 연필을 봤다”고 말을 바꿨다.[5]

주요 피해자 정원섭씨와 그 가족

경찰은 정씨의 아들에게 그 연필을 보여주며 “이게 네 연필이냐?”고 물었다. 아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했고, 결국 이게 정씨가 강간살해범이 돼 옥살이를 하게 된 결정적 증거로 작용하였다.[6] 이후 아들은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7]

구금 1년도 안 돼 아버지가 충격으로 사망했고 가족들도 주위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동네를 떠나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8]

“죽지 못해 살았죠. 춘천에서는 그날로 바로 쫓겨났어요. 큰애가 아홉 살이고 막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여자가 혼자 애 넷 키우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 했겠어요. 형님 집에 가 숨어 있는데 거기까지 찾아와서 사람들이 행패 부렸어요. 형 확정 뒤 광주 교도소로 갔는데 가족은 서울에 있어서 자주 못 봤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걷지 못하게 됐어요. 엄마 그렇게 다치고 나서 큰아들이 중학교 마치고 노동판에 뛰어들었어요. 그 아들이 제일 불쌍하죠. 남들은 다 하는 공부 중학교밖에 못했으니. 내가 교도소에서 1987년에 나오고 나니 막내가 고등학교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완전히 우리 가정은… 나만 죽인 게 아니라 우리 가족 다 죽인 거예요.”[9]

정씨는 원래 신학교를 다니며 목사가 되려고 했으나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신학교를 포기하고 만화방을 차린 것이었다. 이후 누구보다 성실하게 수감생활을 했다. 모든 규정과 교도관들의 지시를 정확하게 준수했으며, 기독교도로서 신항생활도 열심히 했다. 모범수로 선정돼 1987년 유기징역의 상한인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87년 15년만에 나올수 있었다. 이후 신학교를 복학하여 목사가 되었다.[10]

진실 규명

이후 정원섭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무려 15년 장기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권고로 재심이 이뤄져 2011년에 뒤늦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때 장원섭씨의 나이는 팔순을 바라보는 77세였다.

2013년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3부(박평균 부장판사)는 정씨와 그의 가족 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26억3752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구금 1년도 안 돼 아버지가 충격으로 사망했고 가족들도 주위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동네를 떠나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며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밝혔다.[11]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3년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26억원의 손해배상금 소송에서 소멸시효를 이유로 패소하여 단 한 푼도 배상받지 못하였다.[12]

문화

2013년 개봉하여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7번방의 선물은 이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장편소설 <뿔>은 이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