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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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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한자:嫌韓)은 헤이트 스피치 등을 통해 한국•한국인 등을 증오하는 제노포비아이다.

기원

혐한은 결코 현대 인터넷 문화 또는 정치적 갈등의 산물이 아니다. 혐한은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근대 국가가 형성될 무렵에는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여러가지 상징과 담론을 동원하여 자민족의 우수성과 자국사의 특별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자국사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타국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자국사를 ‘독창적이고 선진적이며 위대한’ 역사로 꾸미기 위해 인접국인 한국 역사를 ‘사대주의적이고 후진적이며 미개한’ 역사로 정리했습니다. 자기들이 ‘잘났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 한국인들에게 ‘못났다’는 낙인을 찍은 거죠. '혐한의식'에 기초한 역사가 한국에서는 ‘식민사학’이고 일본에서는 ‘민족사학’이었습니다.  한국 역사와 한국인을 멸시하는 ‘혐한의식’은 일본의 근대 국민교육에서 기본 정서였습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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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시 히가시구에 주소를 둔 한 관리가 미군이 일본에 진주한 뒤 두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현재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그 내용으로 하는 편지를 맥아더 사령부에 보냈다. 그는 그 편지에서 현재의 식량 부족 원인이 조선인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인은 일본인의 4배를 먹고, 이들이 암시장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조선인 200만명이 일본인 800만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먹어치우므로’ 조선인들을 조속히 귀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식량 부족인’이라는 가명으로 쓴 1947년 2월의 한 편지는 ‘100만명의 조선인을 돌려보내면 식량 부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고, 범죄도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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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은 일본인의 습관적 공격 대상” 1947년 8월에 한 여학생이 ‘조선인은 문화가 얕은 저속한 민족이고, 우리 일본인이 제일 미워하는 러시아인과 흡사하다’며, 난폭한 조선인을 처벌하고, 세계 평화를 건설해줄 것을 청원하는 편지를 점령군 당국에 보냈다. 나이 어린 소녀의 감정적인 대응으로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그 무렵 조선인을 사회적 혼란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에서 나아가 공산주의자이자 정치적 위험요소로 지목하는 편지가 다른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나타나고, 일본 정부가 그러한 현상을 조장하는 태도를 취하며, 점령당국은 그것을 방조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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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조선인의 생활권을 옹호하기 위해 요시다 내각을 향해 벌인 1946년 12월 집회 사건을 돌아보건대 우리 조선인은 여전히 일본인들의 습관적인 공격에 의해 탄압 받고 있다. 우리 조선인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당신은 우리 조선인의 생활권을 보장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우리 60만 재일조선인들은 당신들의 재심 또는 사면과 석방을 위해 청원서를 보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 사건을 다룬 일본 관계당국은 우리 청원서를 단 한 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아! 불쌍한 우리 세 동지여.”(윤표원이 김기택에게 보낸 편지, 1947년 8월15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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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에서 식량난 등이 심각해지자, 그 원인을 재일조선인에게 돌리는 일본인이 많았다. 마에다 젠지로가 1947년 8월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를 요약한 내용이다. 그는 “조선인은 본래 열등한 민족으로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용욱 교수 제공[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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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편지들은 식량 위기의 해결이라는 경제적 이유에서 조선인의 조속한 귀환을 촉구했지만 동시에 조선인을 암거래자, 우범자 등 각종 사회문제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했다. 아래 편지는 발신자가 조선인을 각종 사회문제의 주범으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종적 편견과 연결해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인은 중국인, 일본인보다 열등한 인종이고, 조선인이 일본의 경제를 착란시키고, 일본의 치안을 어지럽히며, 절도, 소매치기 등이 조선인의 집단적인 직업이고, 식료, 기타 중요 물자를 매점하므로 모든 조선인 가정을 수색하여 숨긴 물자를 압수하고, 이들을 조선으로 추방하기 바랍니다.”(마에다 젠지로, 1947.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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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체격이 일본인보다 큰 것은 그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먹는 것은 모두 몸으로만 간다. 그들에게서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을 찾아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동물적 본능으로 살아간다.”

“조선인은 다듬지 않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흙을 퍼서 벽을 쌓으며 볏짚으로 지붕을 만든다. 그들은 새나 곤충과 같은 방식으로 집을 짓는다. 그들의 집에서는 자연과 대비되는 인간의 예각(銳角)을 찾아볼 수 없다. 조선인의 삶은 사람보다는 동물에 가깝다.”

일본인들은 이런 텍스트들을 수없이 접하면서 '조선인관'을 형성했습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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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으로 함께 살던 일본인 민간인들은 조선인들이 '소련의 스파이짓'을 해서 전쟁에 졌다며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이웃이었던 스물일곱 명의 무고한 조선인들이 희생양이 됐다.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나서 사체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소련의 재판 기록에 남아 있던 흐릿한 사진들은 대부분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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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려진 미즈호와 카미시스카 이외에도 사할린 우글레고르스크(당시 에스토루)등에서도 조선인 학살 사건이 있었다는 증언을 확보하고 관련 내용이 언급된 소련 공식 문서도 입수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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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께 규모 7.9의 대지진이 도쿄를 비롯한 일본 관동지방을 강타했다.

대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부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폭탄을 소지하고, 방화한다'는 괴소문이 도쿄 전역에 나돌기 시작했고 일본은 즉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일본 군중은 '조센진 고로세!'(조선인을 죽여라!)라 외치고 다니며 지나가는 사람과 차량을 일일이 검사하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본 군대와 경찰, 각지에서 만들어진 '자경단'이란 자위집단 등이 죽창과 쇠갈퀴, 곡괭이로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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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조선인이다. 조선인은 겉으로는 복종하고 있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저항하고 있다. (중략) 나는 히틀러 총통의 유대인에 대한 정책과 마찬가지로 불령선인은 깡그리 어느 외딴 섬에 격리시켜 한 놈 빠짐없이 거세해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불령선인은 없어지고, 앞으로도 못 나올 것이다. 이제부터 대동아 10억의 백성들을 통치해가지 않으면 안 될 황국 일본이 고작 3천만 정도의 조선인을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우선 조선인 사상범을 모조리 거세해버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히틀러 총통은 이미 유태인 거세를 실행하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서쪽에는 독일•이탈리아 양 민족, 동쪽에서는 야마토 민족이 다른 민족을 통치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1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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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을 각종 문제들의 주범이자 원흉으로 인식한 것이 지금까지 내려와 현대의 혐한들은 각종 사건이 터지면 범인을 자이니치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2016년 구마모토 지진 때 우물에 조선인들이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유포되기도 했다. 이는 관동대학살 때와 같은 래퍼토리이다.[14]

1995년 한신대지진 때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나카무라 의원 : 고배시 나가타구 일대에서 불이 난 것은 재일 한국인들이 불을 질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들었습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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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