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위키 사용자 여러분! 진보위키 2.0 프로젝트를 통한 진보위키의 구조적 개편을 알립니다! 더 알아보기..
  • 이제 진보위키 계정에 이메일이 인증되지 않으면 문서 편집이 불가능합니다.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을 인증해주세요.

호지명

진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호지명(Hồ Chí Minh / 胡志明 / 호 찌 밍, 1890년 5월 19일 ~ 1969년 9월 2일)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이며, 국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에 맞서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에 맞서 싸웠으며, 이후 프랑스와 미국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먼치킨 같은 이력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하기전인 1969년 미국과의 전쟁도중 사망했다. 물론 이를 계기로 베트남은 미국에 맞서 더 가열차게 싸웠고,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초기 이력

호지명은 1890년 베트남의 낌 리엔사(Kim Liê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는 서당 훈장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응우옌 씽 꿍'이었고, 그가 열살이 되는 해 그의 아버지는 '응우옌 떳 타잉'이라는 이름을 다시 지어주었다. 그는 어린시절 한자와 유교를 공부하고 삼국지를 읽기도 했지만,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해 화경성이 있는 후에성포(Huế)로 가서 프랑스식의 국립학교인 국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국학에 들어가게 된 호지명은 프랑스의 착취에 맞서는 반프랑스 시위에 참가하여 프랑스인과 베트남인들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는데, 이게 결국 국학에서 퇴학을 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퇴학당한 그는 베트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남쪽에 있는 시곤성포(현 호지명성포)로 갔고, 1911년 시곤에 정박해있던 프랑스 기시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에서 주방보조로 취직한다. 당시 그가 취직하기 위해 쓴 가명은 '바'라는 가명이었다 한다. 주방보조로 취직하게 된 그는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를 타고 베트남을 떠난다.

베트남 독립운동에 투신

프랑스 및 해외에서의 활동

사실 호지명이 취직한 곳은 해외를 돌아다니는 프랑스 선박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등을 여행한다.1911년 7월 호치민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한 뒤, 프랑스 하층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게 된다. 그는 세네갈에 있는 다카르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도 프랑스인들의 명령에 따라 배까지 헤엄쳐 가던 아프리카인 몇 명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 시기 호치민은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 있는 호텔 ‘옴니 파커 하우스(Omni Parker House)’에서 요리사로 일했고, 노동자로도 일하며 흑인인권운동에도 관여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극우 단체인 KKK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1914년 호치민은 영국 런던에서 청소부 요리사 보조 등 온갖 일을 하며 노동조합 활동에 관여했다.

1917년 1차세계대전이 한참이던 중 호지명은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베트남 사람들을 위한 활동에 관여했다. 1918년 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호치민은 파리강화회의때부터 베트남의 독립을 청원하는 문서를 보냈고, 1919년 6월 베르사유 회의에서 '응우옌 아이 꾸옥'이라는 가명으로 요구사항을 발표했으나,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를 철지히 무시해버렸다.

최근에 밝혀진 내용이지만, 당시 호치민이 프랑스에 거주할 때, 김규식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했고, 추측하건데 그런 경험을 통해서 호지명은 일본또한 제국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 같다.[1]

프랑스에서의 활동과 모스크바 유학

일제시기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듯이 호지명 또한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20년 호지명 또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프랑스 공산당 내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프랑스 공산당 내의 인물들과 사상적으로 부딧히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무었이 우선이냐라는 쟁점에서 부딧혔던 것이었고, 프랑스 공산당 또한 원칙적으로는 식민지배를 반대했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국제 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해 ‘제3인터내셔널’을 1919년에 창설했다.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러시아의 레닌은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태제’를 발표했고, 이는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던 국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1920년 호치민 또한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고 제3인터내셔널 협력위원회 의원이 되었다. 즉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가 젊은 호치민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1921년 호치민은 국제식민지연맹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베트남 식민지배에는 반대하지만 베트남 자체에는 무관심 했던 프프랑스 공산당하고 많이 갈등했다고 한다.

1922년 호지명은 프랑스에서 <르 파리아>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편집인으로써 활동했다. 그가 창간한 이 르 파리아라는 신문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아주 노골적으로 비판했었는데, 때문에 프랑스 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결국 활동이 어려워진 호지명은 프랑스 당국의 감시를 피하여 사회주의의 나라 소련으로 피신한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호지명은 1919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창설한 '제3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에서 활동했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소련의 국부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1924년 1월 그가 사망하면서 결국 만나지 못했다. 그 시기 레닌의 아네 크룹스카야와 트로츠키 그리고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등과 맞나 교우했고, 제5차 코민테른 대회에도 참석했다. 이때 호치민은 코민테른 극동국에 있으면서,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등과 교우했고, 식민지 해방 운동 문제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다. 과거에 호치민이 조선공산당 계열의 독립운동가 이정 박헌영과 1929년 모스크바 유학 시절 만났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인 정병준 교수에 따르면 호치민과 박헌영이 1929년에 같이 찍은 걸로 알려진 사진은 사실 1921년 촬영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29년에 호치민은 태국에 있었지 모스크바에 있지도 않았다. 호치민이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은 1934년이었다.

박헌영은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치민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 그가 크게 감명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근거는 없다. 심지어 목민심서가 호치민 시신의 머리맡에 놓여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며, 박물관에 있다는 말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90년대 KBS-1에서 베트남 현지 취재를 가서 촬영한 영상에 의하면 호찌민의 서재에 목민심서 책이 있었던 걸 보여준 적이 있으며, 서재 담당이 호찌민이 즐겨봤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2006년 호찌민 관련 유품이 12만점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목민심서가 없다는 기사가 나왔다.[2]

중국에서의 활동

1924년 12월 호지명은 중국의 광주로 갔다. 거기서 세워진 혁명단체의 교사로 활동했다. 그 시기 호지명은 <혁명의 길>을 집필하는 등 반프랑스 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 당시 호치민은 1926년 1월 광저우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조선의 독립운동가인 몽양 여운형과 더불어 아시아인 대표 중 한 사람으로서 연설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제1차 국공합작이 장개석의 배신으로 결렬되면서, 호지명 또한 죽을 위기에 놓였고, 이를 피해 잠시 중국을 떠났다. 당시 위기의식을 느낀 호치민은 1927년 공산당이 국민당으로부터 탄압 받자 호치민은 홍콩을 거쳐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했다. 11월 파리, 베를린 등에 머물며, 12월 반제국주의 동맹 집행위원회에 참석했다.

동양공산당 창당

1930년 호지명은 베트남의 사회주의 조직을 합쳐 '동양공산당'을 창당한다. 호지명이 동양공산당을 창당하기가 무섭게 옌 바이성에서 응우옌 타이 혹 국민당 주석을 중심으로 민중 봉기가 발발한다. 공산당 또한 이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봉기는 커져만 갔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였던 프랑스는 군대와 전투기를 동원하여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그 결과 수천명이 프랑스에게 도륙당였다.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혹 주석과 혁명군 수뇌부들은 참형에 처해졌다. 1931년 향항에 있던 호지명은 체포되어 감옥생활 및 프랑스 당국의 취조를 받는다.

이후 석방된 호지명은 다시 모스크바로 건너가 활동했는데, 1934년 호치민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대학에 입학했다. 1935년 호치민은 모스크바로 건너가 코민테른 제7차대 회에 참가 했고, 스탈린 대학교에서 교사로도 활동했다.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참일 때인 1938년까지 마르크스의 서적인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고, 교사생활을 하며 모스크바에서 머물렀다. 모스크바를 떠난 호치민은 중국 계림성으로 들어가 팔로군 본부에서 일했고, 이 시기 호지명은 반 프랑스 연대 운동을 전개했다.

태평양 전쟁과 독립투쟁

1940년 호지명은 운남성 주변에서 활동했고, 이제서야 중국식 가명인 '후즈밍'이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 이때 베트남은 프랑스가 나치독일에 함락됨에 따라 나치의 동맹국 일본에게 점령당했는데, 이 때부터 호지명은 무장투쟁을 점진적으로 준비했었다.

1941년 베트남을 떠난지 약 3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호치민은 '베트남독립동맹'을 창설하고, 일본에 맞서 싸웠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 기습공격을 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호지명은 연합국의 일원인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1942년 8월 스파이로 오인받아 경찰에게 체포 당했다. 체포당한 호지명은 2차세계대전의 전황이 급변하던 1943년 9월이 되서야 석방됐다. 당시 호지명이 석방되고 난 후, 월맹 측 일원이 그를 석방시키러 갔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알겠다고(是: shi)" 한 것을 잘못알아들어 "그가 죽었다(死:si)"로 알아듣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대일전을 준비했듯이,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4~45년 베트남에서 베트남의 호지명과도 협력을 추구했다. 특히나 1944년 11월 호치민이 베트남에 불시착한 미군 조종사를 구출해주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좋아졌었다. 당시 호치민이 구해주었던 미군 조종사는 호치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한다. 아무튼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미국은 현재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를 베트남으로 보내 호지명의 베트민을 도왔다. 이후 호치민과 접선한 OSS는 호치민이 이끌던 베트민 조직에게 탄약, 무기, 식량 등을 지원했다. 1944년 베트남 해방군을 창설한 보응우옌잡 또한 미국의 OSS랑 협력했다. 1945년 호지명의 월맹은 대략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소유한 규모로 성장했다. 호지명의 월맹은 OSS와 함께 소규모의 공동작전을 벌이기도 했었다. 1945년 7월 16일에는 앨리슨 토머스 소령이 이끄는 50명의 OSS 게릴라 부대가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게릴라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자동소총, 기관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지압장군의 게릴라 부대가 몇 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했고, OSS의 ‘사슴팀’은 베트민과 계속 공동 작전을 펼치면서 관활 지배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당시 미국의 OSS로써 호찌민의 베트민을 도왔던 장교 아르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는 자신의 저서 《왜 베트남인가: Why Viet Nam? Prelude to America's Albatross》에서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 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라고 언급하며 베트남이 미국과 전쟁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고 밝혔다.[3]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일본은 빨리 항복했다. 물론 호지명은 이를 대비했고, 일본이 항복할 시기 베트남에서 총봉기를 일으킨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의 독립선언

일본이 패망할 때 쯤인 1945년 8월 호지명은 베트남 내부에서 총봉기를 일으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고 그해 9월 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 항복일에 맞춰 수도 하내성포 바 딩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한다. 당시 호지명이 선포한 베트남의 독립선언은 전혀 공산주의적이지도 않았고, 미국의 독립선언과 유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이다.이 불멸의 선언은 1776년 미합중국의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넓은 의미에서 이런 뜻입니다. 지상의 모든 민족들은 날 때부터 평등하며, 모든 민족은 생존의 권리, 행복과 자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1791년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문에는 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이 자유와 평등의 권리는 평생 유지되어야 한다.”[4]

프랑스의 재점령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호찌민은 미국과 연합하여 일본 및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몰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7월 일본의 항복을 논의하기 위해 베를린 교외에서 열린 포츠담 회담 당시 연합국들은 일본의 항복을 논의하며 인도차이나 문제 또한 합의를 봤다. 연합국들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북위 16도선을 기점으로 분할 점령하기로 했고, 일제가 패망한 이후 베트남에는 두 강대국이 들어왔다.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쪽에는 중국국민당군이 들어왔고, 남쪽에는 영국군이 들어왔다. 남쪽에 영국군이 들어오며 문제가 생겼는데, 프랑스도 함께 온 것이다. 중국군의 경우 1946년 2월 16도선 이북에서 철수하자 프랑스는 군대를 앞세워 북부지역을 접수했다.[5] 다시 베트남으로 온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할 생각이었다. 이에 호지명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하여 프랑스를 몰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프랑스는 자신들의 식민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그 과정에서 꼭두각시 황제인 바오다이(Bao Dai)를 내세웠다. 이에 반대하는 베트남 민중들의 봉기가 사이공을 비롯한 코친차이나 일대에서 일어나기도 했었다. 호치민은 당시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인 장생트니와의 협상을 이어나갔다. 프랑스와의 타협기간 동안 호치민은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1946년 7월 호치민은 프랑스의 퐁텐블로에서 열린 평화회담에 참석했다. 그러나 협상은 쉽지 않았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고, 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의 패배

퐁텐블로 협상이 결렬되고 나서 2달이 지난 1946년 11월 프랑스는 베트남의 항구도시인 하이 퐁을 포격하여 민간인 6000명을 학살했다. 이를 계기로 그 해 12월엔 수도 하내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간의 교전이 일어났다.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한 프랑스군은 1946년 12월 수도 하노이에 입성하여 베트민군과의 전투를 치렀고, 장비 면에서 베트민군 보다 앞서 있던 프랑스군은 하노이를 점령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장비나 화력면에서 우세했던 프랑스군은 초반에는 승승장구했다. 이에 맞서 베트민을 지휘하던 보 응우옌 잡 장군은 1947년 1월 탄라오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하노이의 후방 교란적전을 계속했다.[6] 그러나 1947년 10월엔 프랑스의 군대가 레아 작전을 감행하여 비엣 박을 공격함에 따라 호치민이 체포 될 뻔하기도 했지만, 체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투의 양상이 게릴라전으로 바뀌면서 프랑스군은 지쳐만 갔고,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모택동의 승리로 끝나자, 중국공산당은 월맹을 군사적으로 지원해줬다. 당시 미국은 반공주의라는 허황된 망상에 빠져 프랑스의 전쟁비용 80%를 지원해주는 듯,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짓을 일삼았다. 미국이 전쟁 말기인 1954년 까지 프랑스에게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및 기관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을 지원해줬다.[7] 이것만 보더라도 사실상 미국이 전쟁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심지어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디엔 비엔 푸에 군대를 파병할까도 고려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도 프랑스를 돕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반공주의라는 맹목적인 이념이 식민지 지배를 원하는 국가를 도와야 한다는 관념을 만든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0년 전세를 잡은 월맹군은 프랑스군을 몰아 붙혔고 그 해 10월 말에는 북베트남의 홍 강 삼각주 지역에서 프랑스군을 격퇴시켰다. 더 나아가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그리고 공산당 휘하의 베트민은 1954년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 비엔 푸에서 프랑스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다. 디엔 비엔 푸 전투는 1954년 3월 13일 대략 200대의 베트민군 대포가 공격을 하면서 시작되었고, 5월 초 베트민은 디엔 비엔 푸의 외곽 방어선을 뚫었다. 최종 공격은 5월 6일에 이루어졌으며, 1954년 5월 7일 56일간의 포위끝에 프랑스군의 디엔 비엔 푸 요새는 함락됐다. 보 응우옌 잡의 얘기에 따르면 “우리 부대는 사방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적의 본부를 점령하고 적의 참모부 전체를 포로로 잡았다.”라고 한다.[8]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23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으며, 1만 명 이상이 월맹에게 항복했다. 물론 월맹 측도 전투에서 대략 1만 명 가까이 전사했다. 사상자라는 측면에선 베트민이 프랑스군에 비해 3배 이상이었지만, 디엔 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한 덕분에 베트민군은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디엔 비엔 푸 전투는 세계 역사에서 외세로 부터 억압받고 멸시받던 민족이 제국주의를 굴복시키고 독립을 쟁취하는 예를 보여준 사례다. 제1차 인도지나 전쟁 시기 호지명, 쯔엉 찡, 보 응우옌 지압, 팜 반 동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데에 비해 후에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될 인물들은 당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프랑스측에 협력했었다. 따라서 시작부터 남베트남 정권은 정통성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다.[9]

분단과 베트남 전쟁

베트남의 분단

1954년 제1차 인도지나 전쟁이 프랑스군의 패배로 끝나면서, 제네바 협약에 따라 베트남은 17도선을 기점으로 분단되었다. 사실 프랑스는 제1차 인도지나 전쟁을 치르면서, 꼭두각시 황제인 보대제 완복영서를 내세웠는데 이 정부가 분단이 되면서 남베트남이 되었다. 당시 보대제 밑에 있던 오정염 수상은 보대제를 축출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말이 좋아 대통령이었지, 사실상 봉건적인 가족정치와 부정부패가 극에달한 정권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오정염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했어야할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린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호치민과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토지개혁을 위한 법안을 마련했고, 1954년 부터 1956년까지 호지명의 북베트남은 토지개혁을 단행한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가톨릭 신자 60만을 포함한 80만 명이 월남한다. 북베트남에서 단항된 토지개혁은 기존에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친불계열 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반감과 지주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게 했다. 제1차 인도지나 전쟁 시기 베트남을 지원했던 중국측 또한 토지개혁을 도왔고, 자신의 이름을 대장정이라 지은 쯔엉 찡 총비서가 중심이 되어 전개됐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대략 1만 5천 명 정도가 사망했는데, 이들중에는 분명 친불계열 인신들도 있었으나, 억울한 피해도 적지 않았다.[10] 토지개혁의 한계와 무자비함을 안 호지명은 책임자 쯔엉 찡을 총비서직에서 해임하고, 스탈린 격하 운동이 소련에서 있던 1956년 철저하게 자아비판을 하고 권력자리에서 물러난다. 나무위키를 비롯한 극우성이 매우 강한 일각에서는 호지명의 토지개혁을 토대로 비판만 하지만, 사실 토지개혁이 한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토지개혁을 통하여 북베트남의 경제는 미국의 융단 폭격으로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기 전 까지 인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고, 2차대전 당시 일본과 비시 프랑스 그리고 지주들의 부패로 인하여 200만이 아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없앴다. 따라서 토지개혁은 이런 측면에서 성공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극우세력들은 가톨릭 세력들이 월남한 것과 일시적으로 탄압받았던 것에 대해 호치민을 문제삼는다. 물론 가톨릭 계열들이 토지개혁 당시 많이 탄압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톨릭들의 경우 친불계열 인사들도 적잖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또한 호치민과 북베트남측은 북베트남에 남은 90만명의 가톨릭교도를 잘 수용했다. 북베트남 정부와 호찌민은 그들에게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겠다."고 가톨릭교도들 앞에서 종교의 자유를 약속했다. 그 결과 가톨릭 교도들로 새로운 친정부 연락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월남한 주교들을 대체할 새로운 주교들이 임명되었으며 1954년 말에는 가톨릭 사제를 양성할 신학교까지 문을 열었다. 1955년 6월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회 내부 문제에 대하여 바티칸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정부의 포고까지 나왔다.[11] 또한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농업 분야에서 쌀 산출량은 360만 톤에서 520만 톤으로 증가했고, 산업 분야에서는 1955년에 단지 17개 밖에 없던 공장이 1959년에는 107개 국영공장이 건설되었다. 하층 농업협동조합에는 농민 가계의 43.9%가 포함되었고, 직인 53%가 협동조합조직에 가입했다. 문화 영역에서는 우선 문맹이 퇴치됐고, 1955년과 비교하여 일반 학교 학샛 수는 두 배, 중등 직업학교 학생 수는 여섯 배, 대학생 수는 7배 가량 증가했다. 의사의 수도 80%나 증가했다.[12]

북베트남의 토지 개혁 피해자에 대해 더 얘기하자면, 토지개혁은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남북간 인구 교환 직전에 발생한 사건이라 베트남전 당시 부터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것 마냥 북베트남 정권을 미화하던 좌파 언론에 의해 뭍혀 있다가 새로 알려진 사실이 전혀 아니다. 처음에 토지 개혁 과정 중 10만 사망설을 주장한건 프랑스인 공산주의자로서 처음에는 오히려 조국의 군대와 국가에 맞서 베트민에게 협조하다가 책이 아니라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고 전향한 제라르 통가스(Gerard Tongas)로, 이를 이어 받아 당시 열혈 종군기자로 이름 높았던 미국의 버나드 폴이 5만을 주장하다가, 전쟁 중에 전향한 베트콩 호앙 반 끼가 갑자기 난대없이 자신의 저서에서 30만명설을 주장하던게 당시 미국 당국자들의 입맛에 맞아 한동안 닉슨 본인이 100만 희생설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이에 대한 역풍으로 반전 성향의 학자, 언론인들은 게레스 포터가 1972년에 북베트남 당국의 결정을 옹호하는 어조로 겨우 1,500명 희생자를 주장했는데 이건 역으로 지나치게 적은 통계로, 학계 내에서는 이미 2000년대 후반에 당시 노동당 내에서 "대충천명당 지주 한명씩 죽여라" 라고 명시한 내부 문서가 공개 되며 이에 따른 계산이 가장 최근에 이 주제만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학자, 에드윈 모이즈의 15,000 추산과 맞아 떨어지면서, 당시 신생 정권의 통계적 부정확함, 통계에 잡히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례 등을 감안하면 1만 5천에서 2만 가량으로보는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또한 대략 30년 이상을 호치민 연구에 몰두해온 호치민 평전의 저자인 윌리엄 J 듀이커도 최대 1만 5천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따라서 10만 명 사망설은 매우 과장된 추산이다.[13]

베트남 전쟁을 옹호하는 일각에서는 가족정치로 인하여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오정염 정권이 혼란에 휩싸였던 것을 두고, 마치 북베트남이 간첩을 침투시켜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남베트남 내부의 혼란을 야기시켰다는 듯이 얘기를 하는데, 이는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얘기하지 않는 선전선동이다. 1960년에 탄생한 베트남남면민족해방진선 이른 바 베트콩은 오정염의 독재 정치와 토지개혁의 실패 그리고 불교도 탄압과 같은 막장정치로 인하여 남베트남 내부의 사람들이 스스로 봉기하여 창설한 단체였고, 북베트남은 이를 지켜보며 지원하는 형식이었다. 즉 남베트남의 내부사태는 남베트남의 관료들이 자초한 것이지 북베트남의 탓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간첩이라 주장하는 남베트남 침투 세력들의 지도세력들을 일일이 따지고 보면 대불항전시기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던 독립투사들이었다. 아무튼 이런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자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속적으로 지원했고, 이래도 남베트남이 버티기 힘들자 미국 정부는 통킹만에서 도발을 하는데 이게 바로 통킹만 사건이다. 따라서 이런 복합적인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베트남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에 맞서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베트남전쟁

오정염의 막장정치로 남베트남은 혼란에 쌓였고,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분하여 남베트남 사태에 개입했다. 오정염의 막장 정치로 인하여 수많은 학생들과 불교 신자들까지 들고 일어났고, 혼란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1963년 6월 천모사 주지스님인 틱 꾸앙 득이 오정염 정권에 맞서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시곤성포의 시내에서 거리행진을 하다가 경찰이 막아서자 몸에 기름을 붙고, 소신공양을 했다. 그걸 본 오정염의 재수인 쩐 레 쒄은 그 중놈이 한 것은 바베큐가 된 것 밖에 없어. 거기다 그 기름도 자급자족한게 아니라 수입한걸 썻지.라고 하며 인간이하의 고인드립을 대놓고 했다. 더 나아가 응오딘지엠 정권은 전투에서도 무능하기 짝이 없었는데, 미군으로 부터 최신식 헬기를 지원받은 1500명의 남베트남군이 300명도 안되는 베트콩에게 대패하기도 했었다. 압박 전투가 그러했다. 아무튼 응오딘지엠 재수의 막말에 어이를 상실한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CIA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 내부의 쿠데타를 지원하여 오정염을 축출하고, 즈엉 반 밍이 이끄는 새로운 정권을 새운다. 그러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남베트남은 쿠데타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혼란에 빠졌고, 이대로 놔두면 내부 총질로 망할 상황이었다. 응오딘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10번 이상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1965년 7월 응우옌 반 티우가 정권을 잡으면서 끝이 났다. 결국 미국은 1964년 북베트남의 북부만 해엽에서 '북부만 사건'을 일으켜 베트남을 침략한다.

1965년 부터 미국은 북베트남에게 어마무시한 대규모 융단 폭격을 가했고, 이에 따라 북베트남의 도시들은 말그대로 초토화가 된다. 그리고 미국은 고엽제를 뿌려가며 베트남의 밀림을 오염시킨다. 이런 미국의 반인륜적인 행위를 직접경험한 베트남인들은 미국에 맞서 싸웠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태국도 남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한다. 1966년 호지명은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했고, 베트남인들은 미국의 침략에 맞서 전력을 다해 싸운다. 그 구절은 북베트남인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

1968년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이 호지명의 허락을 받고 감행한 구정 공세를 개시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들이 베트콩의 공격을 받았다. 베트남의 옛 수도 후에는 베트콩이 1달 간 점령했고, 케산은 제2의 디엔비엔푸 전투를 연상시켰으며, 수도 사이공은 잠깐이기는 하지만 베트콩 공격부대가 미대사관1층을 점령했다. 그러나 구정공세 1달 기간 동안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3만 명 이상이 죽었던 데에 비해 미군 2천명 이상이 사망하고 3천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구정공세는 전투 사상자로만 봐서는 미국의 승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거짓 선전을 한 미국의 거짓말이 드러나는 대공세이기도 했다. 인하여 미국은 반전운동에 휩싸였고,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다. 1969년 미국의 대통령이된 닉슨또한 반전 여론에 자극을 받아 '베트남화'라는 정책을 실행하여 단계적인 철수를 감행한다.

사망

1950년대 후반 부터 1960년대까지 사실상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지 않았던 호지명이 한 일과는 중국에 가서 요양치료를 받는 일이었고, 가끔씩 대중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1968년 3월 구정 공세로 인한 반전 운동으로 미국이 고민에 빠져있을 당시 호치민은 베이징에서 구정 공세의 결과를 보고 받았고, 베트남 정치국 국원인 레둑토가 "구정 공세 이후의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곧 남부로 출장을 갈 것"이라고 얘기하자, 호치민 또한 함께 내려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호치민은 자신의 건강 때문에 요양 차원에서 중국을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기에 직접 남부에 내려가지는 못했다. 비교적 건강했던 호지명은 1969년 까지 일상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2일 호지명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가 왔고, 사망한다. 호치민은 1969년 9월 2일 즉 베트남 독립 선포일 24주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그의 사망 소식은 9월 3일에 발표되었고,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장례식이 치러줬다. 이 장례식에는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와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를 비롯한 세계적인 인사들이 참가했다. 당시 캐나다 종군 기자 출신이자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는 호치민의 장례식을 지켜본 유일한 서방 기자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남겼다.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탄과 감동, 혼란이 함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이 행동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잃고 애도하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꾹 참고 견디는 모습이었다. 호치민의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들이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44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에서 여러 논평이 쏟아졌다. 세계 주요 국가에서 조문을 했으며, 북베트남 정부는 121개국으로부터 2만 2천통의 조문을 받았다.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들 나름대로 추모식을 열었으며, 우호적인 사설들을 게재했다. 소련은 공식 성명을 통해 호치민을 “영웅적인 베트남 인민의 위대한 아들이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뛰어난 지도자이며, 소련의 훌륭한 친구”라고 찬양했다.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지도자는 미국과의 전쟁 도중 이렇게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1969년은 미국의 저지른 민간인 학살인 미 라이 학살[14]이 진상이 규명되는 해이기도 했다.

통일

호치민이 사망한 이후 베트남 전쟁의 전개양상은 점차 미군이 철수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미국은 1970년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1971년에는 남베트남군과 공군력을 앞세워 라오스를 침공하기도 했다. 하노이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1972년 미중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수백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한 부활절 공세를 감행하기도 했다. 1972년 부활절 공세 이후 미국은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약11일간 마지막 대규모 폭격을 북베트남에 감행하여,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항구도시 하이퐁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도시들을 초토화 시킴으로써, 마지막 협박을 북베트남에게 가했다. 결국 미국은 1973년 '파리평화조약'을 맺고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한다. 1974년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호지명 켐페인'을 계획하여 실행에 옮겼고, 1975년 3월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세를 가한다. 전면적인 공세를 가하자 미국의 허수아비 정권이었던 남베트남 정권은 북베트남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고,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은 민족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통일을 이룩한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호치민의 업적을 기려 호치민시가 된다.

어록

관련서적

호지명평전

호지명에 대해 알기 위해 읽을만한 책으로는 윌리엄 J. 듀이커가 쓴 호지명평전이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해외파견 장교로 근무했던 호지명평전 저자인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사이공 미국대사관에서 해외파견 장교로 근무할 때 적이었던 베트콩이 자신의 동맹국인 남베트남군 보다 사기를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압도한 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가, 그 배경에는 호지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호지명에 대해 연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30년간 호지명에 대해 연구해서 집필한 책이 바로 "호지명평전"이다. 주로 호지명의 전반 생애와 제1차 인도지나전쟁까지의 내용을 깊이 다뤘다. 반면에 베트남 전쟁에 대해선 간략하게 다룬 측면이 있다. 976 페이지(각주 빼면 844 페이지)나 되는 분량이 읽는 이에게 부담이 될 수 있겠지만, 호지명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책이다.

왜 호치민인가

현재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한베평화재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치과의사인 송필경씨가 쓴 베트남 여행기이자 호치민 관련 서적이다. 베트남 사람들이 들려주는 호치민 이야기와 베트남의 역사 긔리고 베트남의 근현대 유적지들과 베트남 전쟁을 탐구했다. 호치민의 생활과 베트남인들이 얘기하는 것을 통해 그의 감동적인 삶과 자랑스러운 베트남 저항의 역사를 잘 알려주는 책이다.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살아생전에 호치민이 남겨놓은 글과 편지 그리고 연설문들을 모아 출판한 책이다. 주로 프랑스와 일본 그리고 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또한 호치민의 검소한 생활상과 부패하지 않는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책이다. 호치민이 어떤 연설을 했고,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각주

  1. 감시 佛 경찰문건 대거발굴…한국 임시정부 활약상 생생
  2. <호찌민 주석 옆에는 목민심서 없다>
  3.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36.
  4. 호치민 평전 p.483~484
  5. 전환시대의 논리 p.364
  6.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59
  7.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83
  8. 호치민 평전 p.668
  9. 미국이 내세웠던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오딘지엠만 보더라도 1930년 프랑스에게 공산당을 고발하고, 반프랑스 봉기를 진압했던 흑역사가 있다.
  10. 일각에서는 토지개혁 당시 사망자가 최소 10만 이라는 얘기를 하는데, 최근 베트남 노동당쪽의 문서가 공개되면서 대략 1만 3천명에서 1만 5천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도 대략 그정도로 보고있다.
  11. 호치민 평전 p.712
  12.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p.250
  13. https://web.archive.org/web/20110420044800/http://www.lib.washington.edu/southeastasia/vsg/elist_2007/Newly%20released%20documents%20on%20the%20land%20reform%20.htm
  14. 미라이 학살은 1968년 3월 16일 26명의 미군이 미라이 지역 마을에서 대략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사건이다. 미군은 이를 은폐하려 했으나 미국의 어느 양심있는 기자 덕분에 진상의 철저하게 규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