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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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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는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는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홧발로 으깨버리고" "얼굴을 위로 돌리게 해놓고는 안면을 군홧발로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 곤죽을 만들었다" 공수부대는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들의 발과 머리를 맞들고 좌우로 '하나, 둘' 흔들다 '셋'하고 트럭으로 던졌다. 쓰러진 사람 위에 사람들이 겹겹이 쌓였다.[1]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민주화 항쟁을 말한다. 독재정권의 무력진압과 학살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전개

5월 18일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은 광주의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다. 이에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계엄군 사이에 충돌이 발행했다. 계엄군이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자 학생들은 광주의 중심에 있는 금남로 진출하였다. 그러자 계엄군은 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체포하였으며 많은 부상자와 연행자들이 발생하였다.

5월 19일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씨가 새벽 3시에 최초로 사망했다.

5월 19일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학생들의 시위에 동조하며 금남로에 모여들었다. 시위가 격화되어 투석전을 전개했다.

오후 4시 30분 경에,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계엄군의 장갑차가 시위대에 의해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첫 발포를 하였고 김영찬씨가 계엄군의 총에 의해 부상당하였다.

5월 20일

5월 20일 계엄군의 폭력을 목격한 200여대의 택시가 무등경기장에서 금남로로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였다.

광주역광장에서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여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5월 21일

5월 21일 오후 1시 경에,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공수부대가 사격을 시작했다.

계엄군의 집단발표에 맞서 시민들은 무장항쟁에 나섰다.

5월 21일 오후 5시 30분 경에, 공수부대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하였다.

5월 22일

5월 23일

오후 1시 경에,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버스에 사격하고 승객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가 살해하여 승객 18명 중 17명이 사망하였다.

5월 24일

“군용 트럭을 타고 가면서 모내기하던 농부, 물놀이하던 어린이, 운동장에서 뛰놀던 초등학생을 쏘아 죽이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고개 숙인 채 마을을 향해 총을 쏴대는데 미친놈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2]

오후 1시 20분 경에, 공수부대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하여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오후 2시 20분 경에, 군인들끼리 서로 오인하여 총격전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화풀이로 인근의 무고한 주민들을 다수 살상하였다.

5월 25일

5월 26일

5월 27일

오후 3시 경에,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였다.

오후 5시 10분 경에, 진압작전이 종료되었다.

사상자 및 실종자

  • 항쟁당시 사망자: 165명[3]
  • 부상후유증 사망자: 376명(추정)[4]
  • 행방불명: 65명[5]
  • 사망자 합계: 606명[6]
  • 부상: 3139명
  • 구속 및 구금 등 기타: 1589명

같이 보기

관련 기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