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위키 사용자 여러분! 진보위키 2.0 프로젝트를 통한 진보위키의 구조적 개편을 알립니다! 더 알아보기..
  • 진보위키 신문고가 개장하였습니다! 자유게시판, 사랑방(위키 토론), 차단 재검토 요청은 진보위키 신문고를 이용해 주세요. 더 알아보기..
  • 이제 진보위키 계정에 이메일이 인증되지 않으면 문서 편집이 불가능합니다.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을 인증해주세요.

"난징 대학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진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욘 라베)
(욘 라베)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하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42번째 줄: 42번째 줄:
  
 
==욘 라베==
 
==욘 라베==
독일 회사 지멘스 사의 상하이 지사장이었던 욘 라베(John Rabe)는 난징 시 서쪽 외곽에 안전구역을 설정하여 서양인과 수많은 중국인의 목숨을 구했다. 이는 시진핑 주석도 언급할 정도로 중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ref>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4/03/29/0601020100AKR20140329027052083.HTML</ref> 이러한 그의 스토리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
독일 회사 지멘스 사의 상하이 지사장이었던 욘 라베(John Rabe)는 자신의 나치당원 신분을 이용하여 난징 시 서쪽 외곽에 안전구역을 설정하여 서양인과 수많은 중국인의 목숨을 구했다. 이는 시진핑 주석도 언급할 정도로 중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ref>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4/03/29/0601020100AKR20140329027052083.HTML</ref> 이러한 그의 스토리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처벌==
 
==처벌==

2019년 12월 4일 (수) 20:13 기준 최신판

Skull-2636836 1280.png 이 문서는 죽음과 관련된 내용을 다룹니다.
죽음과 관련된 내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합니다.
Beom1.PNG 이 문서는 범죄에 대한 설명을 다룹니다.
범죄행위 또는 범죄사건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다룹니다.

“울부짖는 중국인이 우편낭 안에 넣어지고 입구가 단단히 잠겼다. 그는 우편낭 안에서 날뛰고 울고 소리 질렀다. 우편낭은 풋볼처럼 차이고, 푸성귀처럼 오줌을 맞았다. 니시모토(가명)는 자동차에서 휘발유를 꺼내 우편낭에 들이붓고 불을 붙였다. 휘발유는 한꺼번에 타올랐다. 우편낭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의 신음이 났고, 혼신의 힘으로 우편낭이 날아올랐다. 우편낭 스스로 날아올라 스스로 넘어졌다. 어떤 전우들은 이 잔학한 불장난을 즐거워했다. 우편낭은 지옥의 비명을 지르며 불덩어리처럼 굴러다녔다. 니시모토는 ‘어이, 그렇게 뜨거우면 식혀줄까?’ 하면서 수류탄 두 발을 우편낭 줄에 연결하고 연못 속으로 던졌다. 우편낭이 가라앉았고, 수류탄이 수중에서 작렬했다. 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조용해지자 놀이가 끝났다. 이런 일은 전쟁터에서는 아무 죄악도 아니다. 단지 니시모토의 잔학성에 우리가 기가 막혔을 뿐이다.”

1937년 12월 21일, 일본 육군 제20사단 16연대 상등병 아즈마 시로가 난징 최고법원 앞에서 목격한 장면.[1]

"넓은 강 위엔 온통 시체였다. 강변에도 시체가 높이 쌓여 끝이 안 보였다. 시체 중에는 군인은 물론 일반 백성, 어린아이까지 있었다. 시체는 강물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갔다."[2]

"역사는 시대가 변한다고 바뀌지 않으며, 사실 역시 교활한 말과 잡아떼기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난징 대학살 참사는 무쇠와 같은 증거가 산과 같이 존재하며 어떤 속임수나 곡해도 용납하지 않는다" "누군가 이를 부인한다면 역사가, 30만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13억명의 중국 인민이,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인들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 국가주석[3]

개요

난징대학살 기념관 앞 조형물

1937년 12월 13일 중국을 침략한 일본이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뒤 이듬해 2월까지 대량 학살과 강간과 방화 등을 저지른 인류 최악의 범죄 중 하나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난징대도살(南京大屠杀)이라고 부르며, 일본에서는 축소하는 의미로 난징사건이라고 한다.

피해

학살

약 6주 동안 일본군에게 30만 명의 중국인이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당시 국제적십자사, 세계홍만자회(世界紅卍字會), 숭선당(崇善堂) 등 8개 구호단체들이 수습해 매장했다고 보고한 시신의 숫자만 약 19만8천여 구에 이른다. 발견되지 않은 시신의 숫자를 고려하면 피해자 규모는 30만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4]

강간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도 8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5]

건축물

일본군의 방화와 약탈로 건축물 약 23.8%가 불 타고 88.5%가 파괴되었다.[6]

다른 도시

이 밖에도 일본은 상하이, 항저우, 쑤저우, 우시, 우후, 양저우 등 중국 장쑤성저장성 일대의 주요 도시들에서 학살과 강간과 약탈 등을 자행하였다.[7]

잔학상

1937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과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일본군 소위인 무카이 도시아키노다 쓰요시가 100명의 중국인 목베기에 내기를 건 기사가 보도되었다.

학살에는 총살 뿐만 아니라 참수, 생매장, 십자가 매달기, 혀 매달기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갓난아기를 공중에 던진 뒤 총검으로 죽이기도 하였고, 가족들을 죽이기 전에 근친상간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인을 대상으로 총검술 훈련을 하는 등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다.

욘 라베

독일 회사 지멘스 사의 상하이 지사장이었던 욘 라베(John Rabe)는 자신의 나치당원 신분을 이용하여 난징 시 서쪽 외곽에 안전구역을 설정하여 서양인과 수많은 중국인의 목숨을 구했다. 이는 시진핑 주석도 언급할 정도로 중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8] 이러한 그의 스토리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처벌

전쟁이 끝난 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당시 중지나방면군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가 학살의 방지와 책임자 처벌을 소홀히 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다.

1946년 8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열린 난징군사재판에서 난징에 주둔했던 일본군 6사단 사단장 다니 히사오, 100인 참수 경쟁을 벌인 무카이 도시아키노다 쓰요시, 민간인 300인을 참수한 것으로 알려진 다나카 군기치를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당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던 아사카 야스히코는 왕족에게는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미국의 방침에 따라 처벌 받지 못하는 등 난징대학살의 책임자 처벌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역사부정

일본은 지금까지도 난징대학살 축소 및 부정에 힘을 쏟고 있다.

2007년 12월 13일 중국에서 난징대학살 70주년에 맞춰 난징대학살기념관을 확장 개관했는데 이 기념관 때문에 일본과 중국의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기념관이 확장된 이후 일본은 내용물의 검토를 공식 요청했다.[9]

2015년에는 중국이 난징대학살을 유네스코에 등재 한 것에 대해서 일본이 맹비난을 하고[10] 유네스코 분담금을 끊겠다고[11] 천인공노할 협박을 하였다. 중일관계 문서 참고.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