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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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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공업화와 대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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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스탈린의 연설처럼 소련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아서 고통에 시달릴 때 스탈린의 소련은 초고속 성장의 연속이었다.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문맹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기도 했다. 양질은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의 유급휴가와 주거 의료 그리고 교육이 보장되었다. 특히나 스탈린 시기를 거치면서 90%가 넘던 문맹률은 1% 줄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소련 인민들의 수명 또한 늘어났다. 1933년에 발표된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4년 3개월 동안에 공업부문은 5년 목표의 93.7%를 달성했다. 중공업 부문은 목표를 초과달성해 목표치의 103.4%에 이르렀고, 경공업 부문은 목표의 84.9%에 달했으며, 산업 성장률이 연평균 20%를 기록했다. 이를 낮게 잡은 서방측의 통계로도 연평균 최소 10% 이상의 성장을 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처럼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이 일어나 대략 300만이 아사하는 사태가 경제개발 제1차 5개년 계획시기 있었다. 일각에서는 스탈린의 공업화 시기 발생한 홀로도모르(Holodomr)를 마치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의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학살인 것 처럼 주장하지만 사실상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과 같이 정책적인 실책이었다. 물론 홀로도모르 그 자체는 비극이나, 조직적인 학살인냥 얘기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고, 학살이라는 식의 주장은 반공주의자와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다. 애초에 스탈린 시기 소련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18년 적백내전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은 상황이었던 것과 소련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이 농업생산량을 풍족하게 늘리기에는 굉장히 까다로운 국가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쉽게 말해 농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미국이나 중국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척박하다는 얘기다.<ref>현재 러시아만 보더라도 시중에 돌아다니는 농산품들 대부분이 수입산이라는 사실에서 러시아의 농업조건이 정말 까다롭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ref> 홀로도모르가 끝난지 1년 뒤인 1934년 부터는 정부가 집단농장으로부터 사들인 농산물에 다시 이익을 붙여 시장에서 팔기도 했었다. 이제까지 소규모 형태로 운영된 농업 생산방식 대신 1천 에이커 단위의 농업이 시작됨으로써 집단화된 토지에는 트랙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과정에서 전국에 수백 개의 트랙터 공급처가 생겼고 정부는 트랙터 본부를 설치하여 영농기계를 집단농장에게 빌려주고 생산물의 20퍼센트를 사용료로 받았다. 이러한 농업의 집단화와 기계화를 통해 농업 생산물에 대한 정부 통제가 가능해졌고, 생산은 증대되었으며, 또한 농촌의 잉여 노동력은 공장 노동자로 전환됐다. 1926년에서 1939년 사이에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인구는 약 2천만 명에 이르렀다.<ref>이야기 러시아사 p.435</ref> 이런 공업화에 힘입어 1928년에 300만 톤이었던 소련의 강철 생산량은 10년 만에 1500만 톤으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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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연설처럼 소련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아서 고통에 시달릴 때 스탈린의 소련은 초고속 성장의 연속이었다.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문맹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기도 했다. 양질은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의 유급휴가와 주거 의료 그리고 교육이 보장되었다. 특히나 스탈린 시기를 거치면서 90%가 넘던 문맹률은 1% 줄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소련 인민들의 수명 또한 늘어났다. 1933년에 발표된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4년 3개월 동안에 공업부문은 5년 목표의 93.7%를 달성했다. 중공업 부문은 목표를 초과달성해 목표치의 103.4%에 이르렀고, 경공업 부문은 목표의 84.9%에 달했으며, 산업 성장률이 연평균 20%를 기록했다. 이를 낮게 잡은 서방측의 통계로도 연평균 최소 10% 이상의 성장을 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처럼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이 일어나 대략 300만이 아사하는 사태가 경제개발 제1차 5개년 계획시기 있었다. 일각에서는 스탈린의 공업화 시기 발생한 홀로도모르(Holodomor)를 마치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의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학살인 것 처럼 주장하지만 사실상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과 같이 정책적인 실책이었다. 물론 홀로도모르 그 자체는 비극이나, 조직적인 학살인냥 얘기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고, 학살이라는 식의 주장은 반공주의자와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다. 애초에 스탈린 시기 소련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18년 적백내전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은 상황이었던 것과 소련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이 농업생산량을 풍족하게 늘리기에는 굉장히 까다로운 국가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쉽게 말해 농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미국이나 중국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척박하다는 얘기다.<ref>현재 러시아만 보더라도 시중에 돌아다니는 농산품들 대부분이 수입산이라는 사실에서 러시아의 농업조건이 정말 까다롭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ref> 홀로도모르가 끝난지 1년 뒤인 1934년 부터는 정부가 집단농장으로부터 사들인 농산물에 다시 이익을 붙여 시장에서 팔기도 했었다. 이제까지 소규모 형태로 운영된 농업 생산방식 대신 1천 에이커 단위의 농업이 시작됨으로써 집단화된 토지에는 트랙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과정에서 전국에 수백 개의 트랙터 공급처가 생겼고 정부는 트랙터 본부를 설치하여 영농기계를 집단농장에게 빌려주고 생산물의 20퍼센트를 사용료로 받았다. 이러한 농업의 집단화와 기계화를 통해 농업 생산물에 대한 정부 통제가 가능해졌고, 생산은 증대되었으며, 또한 농촌의 잉여 노동력은 공장 노동자로 전환됐다. 1926년에서 1939년 사이에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인구는 약 2천만 명에 이르렀다.<ref>이야기 러시아사 p.435</ref> 이런 공업화에 힘입어 1928년에 300만 톤이었던 소련의 강철 생산량은 10년 만에 1500만 톤으로 증가했다.
  
어쨌든 스탈린 시기 소련은 1938년이 되어서는 경제규모로만 보더라도 세계 2위에 도달했다. 특히나 대학 입학률이 증가하여 1930년대 후반에는 100만 명이 대학에 입학하는 고등교육의 대량화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었다.<ref>러시아 혁명사 강의 p.158</ref> 하지만 스탈린은 경제 성장과 동시에 소위 자유를 억압하고 1936년부터 1938년 까지 대숙청을 감행하여 공포정치를 실행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비밀경찰인 NKVD(엔카베데)<ref>레닌 시기 창설했던 체카와 오게페우를 계승한 조직이다. 이후 엔카베데는 1950년대 소련의 KGB가 된다.</ref>를 이용하여 인민들을 감시하였고, 그 시기 정권에 반대하는 파업이 금지되었으며, 1917년 합법화 되었던 동성결혼이 1934년 부터 불법화 되었고 동성애에 대한 탄압 정책이 다시 실행되었다. 대숙청시기 목숨을 잃은 사람이 소련 문서상 68~75만명이 넘고 스탈린 시기 굴라그와 같은 시베리아아 강제수용소로 추방당하거나 감옥에 같힌 사람이 최대 수백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굴라그와 감옥 그외의 수용소 수감자 수치의 경우 연구자마다 제시하는 숫자가 다른데 박노자가 쓴 '러시아 혁명사 강의'에 따르면 1940년대 당시 수용소와 감옥에 185만 258명이 같혀 있었다고 한다.<ref>러시아 혁명사 강의 p.162</ref> 박노자 교수가 이정도로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NKVD가 체포 및 총살 대상자를 정확히 파악해서 기록해 두었고, 그러한 기록이 문서 보관소에 그대로 보관죄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 사회주의 단체인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번역한 스웨덴 공산당원 마리오 소사가 집필한 '진실이 밝혀지다'에 따르면 굴라그를 포함하여 가장 많이 같혀있던 게 대략 250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즉 솔제니친이나 로버트 콘퀘스트와 같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900만에서 1200만이라는 굴라그 수감자 수치는 매우 과장되었다는 얘기. 1937~1939년 사이에 노동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은, 3백만 명이 아닌 16만 명이고, 1950년에는 1200만 명이 아닌, 57만 8천 명의 정치범이 노동수용소에 있었다.<ref>진실이 밝혀지다 p.40</ref> 정리하자면 로버트 콘퀘스트같은 학자와 미국의 허스트 언론사 나치 독일 그리고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짬뽕되어 그 수치가 매우 과장되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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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스탈린 시기 소련은 1938년이 되어서는 경제규모로만 보더라도 세계 2위에 도달했다. 특히나 대학 입학률이 증가하여 1930년대 후반에는 100만 명이 대학에 입학하는 고등교육의 대량화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었다.<ref>러시아 혁명사 강의 p.158</ref> 하지만 스탈린은 경제 성장과 동시에 소위 자유를 억압하고 1936년부터 1938년 까지 대숙청을 감행하여 공포정치를 실행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비밀경찰인 NKVD(엔카베데)<ref>레닌 시기 창설했던 체카와 오게페우를 계승한 조직이다. 이후 엔카베데는 1950년대 소련의 KGB가 된다.</ref>를 이용하여 인민들을 감시하였고, 그 시기 정권에 반대하는 파업이 금지되었으며, 1917년 합법화 되었던 동성결혼이 1934년 부터 불법화 되었고 동성애에 대한 탄압 정책이 다시 실행되었다. 대숙청시기 목숨을 잃은 사람이 소련 문서상 68~75만명이 넘고 스탈린 시기 굴라그와 같은 시베리아아 강제수용소로 추방당하거나 감옥에 같힌 사람이 최대 수백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굴라그와 감옥 그외의 수용소 수감자 수치의 경우 연구자마다 제시하는 숫자가 다른데 박노자가 쓴 '러시아 혁명사 강의'에 따르면 1940년대 당시 수용소와 감옥에 185만 258명이 같혀 있었다고 한다.<ref>러시아 혁명사 강의 p.162</ref> 박노자 교수가 이정도로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NKVD가 체포 및 총살 대상자를 정확히 파악해서 기록해 두었고, 그러한 기록이 문서 보관소에 그대로 보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 사회주의 단체인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번역한 스웨덴 공산당원 마리오 소사가 집필한 '진실이 밝혀지다'에 따르면 굴라그를 포함하여 가장 많이 같혀있던 게 대략 250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즉 솔제니친이나 로버트 콘퀘스트와 같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900만에서 1200만이라는 굴라그 수감자 수치는 매우 과장되었다는 얘기. 1937~1939년 사이에 노동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은, 3백만 명이 아닌 16만 명이고, 1950년에는 1200만 명이 아닌, 57만 8천 명의 정치범이 노동수용소에 있었다.<ref>진실이 밝혀지다 p.40</ref> 정리하자면 로버트 콘퀘스트같은 학자와 미국의 허스트 언론사 나치 독일 그리고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짬뽕되어 그 수치가 매우 과장되었다는 얘기다.
  
 
스탈린이 공업화를 단행하던 시기인 1931년 일본의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1933년 나치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스탈린의 소련은 극동과 유럽에서 압박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업화를 단행하며 스탈린의 소련은 소수민족을 억압했다. 대표적인 예가 연해주 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이 그러했다. 스탈린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7년 이에 따라 그 당시 연해주에 있던 수십만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고, 수만 명의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러한 조치들이 인종주의에 기반한 것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된 미국은 전쟁 국가인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은 탄압하지 않았지만 일본인들만 강제로 이주시키는 짓을 했지만, 스탈린의 경우 비단 고려인 뿐만 아니라 체첸인이나 독일인 아르메니아 인종들도 강제이주 당했다. 이말은 인종 구분 없이 국가 안보에 위협의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주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 시기의 강제 이주는 인종주의적 차별이 아닌 정치적 탄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이 공업화를 단행하던 시기인 1931년 일본의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1933년 나치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스탈린의 소련은 극동과 유럽에서 압박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업화를 단행하며 스탈린의 소련은 소수민족을 억압했다. 대표적인 예가 연해주 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이 그러했다. 스탈린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7년 이에 따라 그 당시 연해주에 있던 수십만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고, 수만 명의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러한 조치들이 인종주의에 기반한 것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된 미국은 전쟁 국가인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은 탄압하지 않았지만 일본인들만 강제로 이주시키는 짓을 했지만, 스탈린의 경우 비단 고려인 뿐만 아니라 체첸인이나 독일인 아르메니아 인종들도 강제이주 당했다. 이말은 인종 구분 없이 국가 안보에 위협의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주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 시기의 강제 이주는 인종주의적 차별이 아닌 정치적 탄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12월 4일 (수) 08:2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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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선진국보다 50~100년 뒤져 있다. 우리는 이 현격한 차이를 10년 내에 좁혀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이루거나 저들이 우리를 압도하거나, 둘 중 하나다."[1]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1879년 12월 21일 ~ 1953년 3월 5일)은 소련의 정치인이자 지도자이다.

1879년 러시아령 조지아에서 태어났다. 1890년대 후반부터 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의 서적을 읽고 조지아에서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고, 체포 투옥 시베리아 유형을 여러번 반복한다. 1차대전 당시에는 투르한스크에서 보내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러시아로 돌아와 볼셰비키당에서 다시 활동한다. 적백내전기 전투 지휘관으로써 참전했고, 트로츠키와 경쟁했다. 레닌 사후 권력 공백기를 틈 타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대숙청과 공업화 등을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소련은 강대국이 되지만, 대숙청을 통해서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국민들을 감시했다. 하지만 그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략을 물리쳤고, 1950년대 그가 통치하는 소련은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존경하는 이유도 그런맥락에서다.

초기 생애

이오시프 스탈린은 1879년 현 그루지야(조지아) 동부에 있는 고리에서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시빌리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면서도 무차별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폭군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이유 없이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스탈린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1888년 9살이 되던 해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아버지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어머니의 항의와 노력으로 스탈린은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고, 1894년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했다.

1894년 종교학교를 졸업한 스탈린은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은 성직자 교과목 외에 문학과 역사, 라틴어, 수학,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성적은 우수하였다. 그 뿐만 아니었다. 젊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루지아 문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감동시켜 격찬을 받을 정도로 시를 매우 잘 썼다. 그가 칼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서적을 접하게 된 것은 1899년이었다. 그 서적을 접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혁명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혁명가 시절

스탈린이 혁명가로서 활동했던 것은 1900년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스탈린은 직업 혁명가가 되었고, 조지아 티플리스 철도 노동자 파업 준비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그는 러시아판 <이스크라>의 재발행과 함께 1901년 지하 인쇄소 니나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조지아어 신문 <브르드졸라>의 창간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1901년 가을 그는 티플리스 사회민주당 지방위원회에 가입했다. 당시 그는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캅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었다. 스탈린은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면서 동료 공산주의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었다. 혁명가로써 활동했던 스탈린은 1902년부터 1903년까지 경찰당국에게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1903년 스탈린은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 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1907년 볼셰비키당에서 활동하던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의 수송방해작전을 획책 하는 데 기여했다. 은행 강탈은 성공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고, 며칠 뒤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스탈린의 강도 행각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계속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스탈린의 은행 강도 행각은 농촌과 중소 도시 은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대도심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도 탈취했었다.

1912년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 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스탈린은 제1차 중앙위원회의 신입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913년 스탈린은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 되었다. 이로써 스탈린은 6번째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했고, 북극해 근처인 투르한스크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운 좋게도 왼쪽 팔이 불구였던 바람에 병역을 기피할 수 있었다. 2월 혁명 이후인 1917년 3월 25일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왔고, 거기서 프라우다 편집진을 다시 한 번 맡게 되었다.

2월 혁명으로 들어섰던 임시정부는 결국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끈 10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적군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아래 구 황제를 복원하고자 하는 백군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적백내전이었다. 적백내전 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더불어 레닌이 선출한 볼셰비키당 정치국의 위원이 되었고, 1918년 5월에는 차리첸(현 볼고그라드)에서 적군을 지휘했었다. 그리고 1922년 스탈린은 코민테른에서 민족문제를 담당한 부서에서 근무했다.

내전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자주 경쟁 했었다. 1919년에 일어난 소련-폴란드 전쟁 당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경쟁은 격해졌다. 당시 스탈린은 남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도시인 리보프를 향한 공세를 명령했지만, 트로츠키는 수도 바르샤바를 공격하려 했었다. 둘 다 서로를 지원하지 않았고, 결국 소련 폴란드 전쟁은 1921년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었다. 1921년 적백내전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지만, 혁명 러시아는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제국주의 국가가 일으킨 내전으로 인한 경제난은 러시아인 수백만을 기아와 굶주림에 빠뜨렸고, 결국 레닌은 기존의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NEP(신경제정책)을 실행하게 되었다. 이후 건강의 악화되어가던 레닌은 1924년 사망했다. 레닌 사망으로 인하여 소련은 또 다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권력을 획득하다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소련은 당내 투쟁에 휩싸였다. 레닌 사후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인물은 트로츠키였다. 당시 까지만 해도 소련 공산당에서의 스탈린의 인기는 그리 높지 못했다. 트로츠키와 그 외의 당내 투쟁이 치열할 때 트로츠키 반대세력은 스탈린하고 협력하고자 했지만, 나중에는 트로츠키와 연합하여 스탈린에 맞서야할 처지가 되었다. 즉 레닌 사후 스탈린은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며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1928년 당내투쟁의 혼란속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사람은 결국 스탈린이 되었다.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국외로 추방했다. 1934년 12월 세르게이 키로프의 암살을 시작으로 오르조니키제,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투하쳅스키등 많은 인물들이 스탈린 대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1934년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은 1936~1938년 '대숙청'의 서막이었다. 숙청을 직접 관장한 기관은 1918년에 만들어진 체카의 후신인 국가보위부(OGPU)가 1934년 7월에 확대 개편된 내무인민위원회(NKVD)였다.

1936년 8월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스미르노프 등 16인이 당시 해외에 망명해 있던 트로츠키와 연계하여 비밀 테러집단을 조직, 키로프를 암살하고 다른 지도자들의 암살을 예비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공개재판에 회부됐다. 이른바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합동본부사건'에 대한 제1차 모스크바 재판이었다. 피고들은 재판에서 범죄사실을 모두 인정한 후 총살당했다.

트로츠키를 국외로 추방한 스탈린은 1940년 멕시코에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했다. 일각에서는 트로츠키가 미제 간첩이라 주장하지만, 박헌영과 마친가지로 확실한 증거는 없다.

공업화와 대숙청

1928년 소련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기존에 펼쳤던, 신경제정책(NEP)를 포기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경제개발은 국가주도의 경제 개발이었다. 즉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고 계획하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식 경제개발이라 불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엄청난 착취와 인권유린이 있었지만, 그 나름 놀라운 경제 성장을 보였다. 1931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스탈린의 연설처럼 소련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아서 고통에 시달릴 때 스탈린의 소련은 초고속 성장의 연속이었다.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문맹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기도 했다. 양질은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의 유급휴가와 주거 의료 그리고 교육이 보장되었다. 특히나 스탈린 시기를 거치면서 90%가 넘던 문맹률은 1% 줄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소련 인민들의 수명 또한 늘어났다. 1933년에 발표된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4년 3개월 동안에 공업부문은 5년 목표의 93.7%를 달성했다. 중공업 부문은 목표를 초과달성해 목표치의 103.4%에 이르렀고, 경공업 부문은 목표의 84.9%에 달했으며, 산업 성장률이 연평균 20%를 기록했다. 이를 낮게 잡은 서방측의 통계로도 연평균 최소 10% 이상의 성장을 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처럼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이 일어나 대략 300만이 아사하는 사태가 경제개발 제1차 5개년 계획시기 있었다. 일각에서는 스탈린의 공업화 시기 발생한 홀로도모르(Holodomor)를 마치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의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학살인 것 처럼 주장하지만 사실상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과 같이 정책적인 실책이었다. 물론 홀로도모르 그 자체는 비극이나, 조직적인 학살인냥 얘기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고, 학살이라는 식의 주장은 반공주의자와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다. 애초에 스탈린 시기 소련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18년 적백내전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은 상황이었던 것과 소련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이 농업생산량을 풍족하게 늘리기에는 굉장히 까다로운 국가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쉽게 말해 농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미국이나 중국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척박하다는 얘기다.[2] 홀로도모르가 끝난지 1년 뒤인 1934년 부터는 정부가 집단농장으로부터 사들인 농산물에 다시 이익을 붙여 시장에서 팔기도 했었다. 이제까지 소규모 형태로 운영된 농업 생산방식 대신 1천 에이커 단위의 농업이 시작됨으로써 집단화된 토지에는 트랙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과정에서 전국에 수백 개의 트랙터 공급처가 생겼고 정부는 트랙터 본부를 설치하여 영농기계를 집단농장에게 빌려주고 생산물의 20퍼센트를 사용료로 받았다. 이러한 농업의 집단화와 기계화를 통해 농업 생산물에 대한 정부 통제가 가능해졌고, 생산은 증대되었으며, 또한 농촌의 잉여 노동력은 공장 노동자로 전환됐다. 1926년에서 1939년 사이에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인구는 약 2천만 명에 이르렀다.[3] 이런 공업화에 힘입어 1928년에 300만 톤이었던 소련의 강철 생산량은 10년 만에 1500만 톤으로 증가했다.

어쨌든 스탈린 시기 소련은 1938년이 되어서는 경제규모로만 보더라도 세계 2위에 도달했다. 특히나 대학 입학률이 증가하여 1930년대 후반에는 100만 명이 대학에 입학하는 고등교육의 대량화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었다.[4] 하지만 스탈린은 경제 성장과 동시에 소위 자유를 억압하고 1936년부터 1938년 까지 대숙청을 감행하여 공포정치를 실행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비밀경찰인 NKVD(엔카베데)[5]를 이용하여 인민들을 감시하였고, 그 시기 정권에 반대하는 파업이 금지되었으며, 1917년 합법화 되었던 동성결혼이 1934년 부터 불법화 되었고 동성애에 대한 탄압 정책이 다시 실행되었다. 대숙청시기 목숨을 잃은 사람이 소련 문서상 68~75만명이 넘고 스탈린 시기 굴라그와 같은 시베리아아 강제수용소로 추방당하거나 감옥에 같힌 사람이 최대 수백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굴라그와 감옥 그외의 수용소 수감자 수치의 경우 연구자마다 제시하는 숫자가 다른데 박노자가 쓴 '러시아 혁명사 강의'에 따르면 1940년대 당시 수용소와 감옥에 185만 258명이 같혀 있었다고 한다.[6] 박노자 교수가 이정도로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NKVD가 체포 및 총살 대상자를 정확히 파악해서 기록해 두었고, 그러한 기록이 문서 보관소에 그대로 보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 사회주의 단체인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번역한 스웨덴 공산당원 마리오 소사가 집필한 '진실이 밝혀지다'에 따르면 굴라그를 포함하여 가장 많이 같혀있던 게 대략 250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즉 솔제니친이나 로버트 콘퀘스트와 같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900만에서 1200만이라는 굴라그 수감자 수치는 매우 과장되었다는 얘기. 1937~1939년 사이에 노동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은, 3백만 명이 아닌 16만 명이고, 1950년에는 1200만 명이 아닌, 57만 8천 명의 정치범이 노동수용소에 있었다.[7] 정리하자면 로버트 콘퀘스트같은 학자와 미국의 허스트 언론사 나치 독일 그리고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짬뽕되어 그 수치가 매우 과장되었다는 얘기다.

스탈린이 공업화를 단행하던 시기인 1931년 일본의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1933년 나치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스탈린의 소련은 극동과 유럽에서 압박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업화를 단행하며 스탈린의 소련은 소수민족을 억압했다. 대표적인 예가 연해주 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이 그러했다. 스탈린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7년 이에 따라 그 당시 연해주에 있던 수십만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고, 수만 명의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러한 조치들이 인종주의에 기반한 것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된 미국은 전쟁 국가인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은 탄압하지 않았지만 일본인들만 강제로 이주시키는 짓을 했지만, 스탈린의 경우 비단 고려인 뿐만 아니라 체첸인이나 독일인 아르메니아 인종들도 강제이주 당했다. 이말은 인종 구분 없이 국가 안보에 위협의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주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 시기의 강제 이주는 인종주의적 차별이 아닌 정치적 탄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몇몇 이들은 스탈린 경제개발과 박정희의 경제개발을 동일선상에서 놓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거론할 가치도 없는 짓이다. 물론 스탈린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 등장한 정권이기에 당연히 박정희 보다 진보적인 정책을 훨씬 더 많이 실행했다. 특히나 복지 부분에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비교가 됐다. 심지어 당시 볼쇼이 극장이 1루블이었고, 여성들에게도 월경휴가를 제공했다. 박정희 시대에 대학교육을 받으려면 부모 개인의 희생을 필요로 했던 데에 비해 스탈린의 소련에선 무상교육을 실행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경우 연금제도를 군인과 공무원 한해서만 했지만, 소련은 193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 연금제도가 자리 잡았고, 박정희가 의료 제도를 철저히 시장 원리에 맡길때 스탈린은 무상의료 제도를 실시했다. 따라서 대중복지만 보더라도 스탈린이 박정희 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인터넷 상에 떠돌아다니는 대한민국 극우세력들의 주장들을 보면 스탈린이 총 2000만 명 이상을 죽였다는 주장을 자주 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그의 개인 독재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매우 과장된 수치고, 프로파간다였다. 냉전이 한참이던 시기 영미의 우파 쪽 저널들에선 스탈린을 비판하기 위해 2000만 명 이상이라는 말들을 자주 했다.[8] 즉 그 주장이 오늘날 까지도 극우세력들의 입맛에 맞아 멱혀 들어간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조국전쟁

1931년 만주를 침공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3년 나치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무장을 선언한 뒤 유럽정복의 야욕을 드러냈으며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1936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던 1936년 스페인에선 파시스트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당시 스탈린은 전차부대를 포함한 일부부대를 보내어 반프랑코 세력을 도왔다. 그리고 1938년에는 조선과 만주 소련 근처인 하산 호에서 일본군과 교전이 일어났고, 1939년에는 소만 국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이 전투를 벌였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와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이오시프 스탈린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이후 스탈린은 히틀러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대략 수천명의 폴란드 장교를 처형하는 카틴 대학살을 벌이기도 했다. 비록 이 때문에 폴란드의 경우 반소련 감정이 생기기도 했지만, 동부 폴란드의 소수 우크라이나계와 벨라루스계 주민들이 쌍수를 들고 소련군을 환영했고, 1939년 10월 하순 소련군 점령지 일대에서 군중집회에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의 합병 요구가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폴란드에 있는 일부 주민들은 독일의 지배보다는 소련으로의 편입을 선호했었다.[9] 아무튼 이 기세를 몰아 소련은 1940년 핀란드 침공과 동시에 발트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을 합병하였다. 핀란드 전쟁은 소련군이 핀란드군에 10배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와의 협정은 매우 불안정한 협정이었다. 애초에 히틀러는 1925년 자신이 쓴 자서전에서 레벤스라움을 운운하며 러시아 지역으로의 영토확장을 주장했고, 반 볼셰비즘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적 성향이 강한 국가였고[10], 러시아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판단하였으며, 소련의 유전지대와 보급물자에 야욕이 있었다. 결국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300만 대군을 동원하여 바르바로사 작전에 개시하면서, 소련을 침공했다.

개전 초반 소련은 우세한 화력을 가진 독일군에게 밀렸다. 개전 초반에 소련군은 주력 항공기 1200대 이상을 대부분 지상에서 잃었고, 독일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였으며, 수십만의 소련군이 나치독일군에게 항복했다. 1941년 9월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고, 1941년 12월에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각까지 들어왔었다. 모스크바를 사수하기로 결정한 스탈린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각까지 들어왔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크렘린 궁에서 집무를 보았다. 1941년 11월 7일에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근처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10월 혁명'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했다.[11] 1941년 12월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각까지 들어오자 모스크바 공방전은 보다 치열해졌고, 1942년 1월 독일군을 모스크바에서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1942년 봄부터 독일군은 다시 진격하여 1942년 8월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했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예상과는 달리 스탈린그라드의 전세는 소련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고 끝났다. 대략 20만 명이나 되던 파울루스 장군 휘하의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했고, 이 때부터 독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은 단결하게 되었다. 산업화 시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독소전쟁이 터지자 탱크와 비행기를 비롯한 군수문자를 초고속으로 찍어냈고, 수많은 소련의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1941년 7월부터 11월까지 총 1523개 공장(이 가운데 군수 공장이 1360개)이 볼가 강 유역과 시베리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이전했고, 여기에는 총 150만 대의 철도 차량이 동원되었으다. 중공업 시설 대규모의 이전과 재조직은 인내력과 조직력의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였다.[12]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미국의 수많은 물자가 소련으로 들어가게 됐고,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물자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1943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쿠르스크에서 대 반격을 시도했지만, T-34전차의 물량에 밀려 이마저도 실패했다. 독소전쟁 초반인 1942년만 보더라도 6개월 동안 소련이 생산한 항공기가 15000대, 탱크가 13000대였다.[13] 이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탈린의 중공업 위주의 성장은 히틀러에 맞선 반파시즘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독소전쟁 시기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이 있자 미국은 일본 제국에게 선전포고했고, 이로부터 4일 뒤인 12월 11일 히틀러는 동맹국 일본을 돕겠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그게 결국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1942~1943년에 미국은 영국과 중국을 지원하는 것과 동시에 소련에도 물자를 지원했는데, 이는 상당한 양의 물자 지원이었다. 미국은 3400만 벌의 군복과 1450만 켤레의 군화, 420만 톤의 식품 그리고 11800대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을 제공했다. 무기 대여법에 의해 소련에게 제공된 트럭이나 지프는 독일과의 전쟁에 있어서 소련군의 기동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은 소련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만약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경제는 전쟁으로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소련에게 스팸이나 시레이션 같은 식량도 제공했는데, 이는 독소전쟁 시기 소련군 참전용사들이 스팸에 대해 추억이 있는 이유가 되었다.

1943년부터 소련은 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에 대항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양측 합쳐서 탱크 1만 대와 대포 3만대 그리고 항공기 5~6천대가 투입된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략 7000대 이상의 탱크를 잃은 소련군은 피로스의 승리를 이루었지만, 그 피로스의 승리는 절대 헛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으로 반격을 개시할 수 있었고, 그 전투를 기점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그리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전략전술이 효율적으로 독일군을 섬멸했기 때문이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2개월에 걸쳐 소련군이 전개한 바그라티온 작전이 성공한 이후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이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되었다. 1945년 4월 소련군은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고, 26일에는 라인강에서 미군과 만났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함에 따라 나치 독일은 5월 8일 무조건 항복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600만 명(이중 1000만명 이상은 소련군인이다.)이나 되는 소련인민이 목숨을 잃었지만, 궁극적으로 소련은 승리했다.

나치와의 전쟁 이후 소련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는데, 그게 바로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그해 7월 스탈린은 유럽에 있던 군대를 시베리아 열차를 이용하여 만주로 옮겼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극동에 배치된 소련군은 1945년 8월 9일 만주 전역에서 진공작전을 감행했다. 8월 폭풍 작전에서 총 15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동원되었고, 이는 26,000문의 야포와 5,300대의 전차 그리고 4,500대에 달하는 항공기가 전투에 투입됐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이 있은 직후에도 진격을 계속하여 한반도 이북까지 군대를 진격시키고, 21일부터 23일 사이에는 원산과 함흥 그리고 개성까지 접수했다. 또한 극동의 소련군은 1945년 8월 18일 사할린 섬을 차지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1905년 러일전쟁에서 잃었던 사할린 절반을 다시 되찾게 된다.

밀리터리 덕후들을 비롯하여 역덕들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인해전술식 전략을 구사하는 것 처럼 묘사한다. 이는 서방에서 만든 영화 <에너미 엣더 게이트>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로 유명한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에서도 마찬가지며, 유명한 FPS 게임인 콜오브듀티 또한 비슷하다. 그러나 실제로 소련군은 그렇지 않았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소련의 군사전략가들은 1930년대부터 전차를 중심으로 한 종심 전술을 연구해왔고, 1932년에는 전차 군단을 만들었다. 물론 위에서 상술한 1941년 부터 1942년 까지는 소련군에게 있어서 후퇴가 거듭되는 절망적인 시기였지만, 1943년 쿠르스크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의 전략전술도 체계적으로 변모하여 독일군의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돌파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게오르기 주코프나 바실렙스키 그리고 로코솝스키 등의 지휘관들과 1942년에서 1943년 부터 잘 협력했다는 것과 그 나름의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다. 독소전쟁사의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그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로가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44년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 50주년 기념일에 미국의 어느 잡지는 표지에 아이젠하워 장군의 사진을 게재했는데, 거기에는 아이젠하워가 히틀러를 패배시킨 장본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명칭은 사실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그리고 아마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 좀 더 일반화하면 1941년에서 1945년 까지 독일에 대항한 소련군과 다민족인 소련 인민들이 전투에서 가장 큰 몫을 해냈다. 일본으로부터의 공격에 1931년부터 계속 시달려 온 중국 정도가 소련의 시련과 노력의 정도에 견줄 만하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보자면 중국의 기여는 소련에 비해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소련은 독일군의 거의 절반과 계속 전투를 했었다.”

출처: 독소전쟁사 p.355

전후복구와 냉전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소련은 경제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았다. 무려 2500만 명의 인구가 살 집을 잃었고, 1700여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의 공장, 6만 5000km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전쟁으로 국부의 약 1/3이 날아간 것이다.[14]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과 소련은 더 이상 동맹관계가 아니었다. 따라서 미국과 서방은 소련의 부흥을 절대 돕지 않았고, 오히려 지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소련은 서유럽 경제학제들의 예견을 무색케 했고, 소련의 침체를 바라던 자들에게 보기좋게 한방 먹였다. 제4차 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경제개발 2년차인 1947년 소련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외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며, 다소 뒤진 소비재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여 1947년 전시에 시행되던 배급제가 폐지됐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두 차례 5개년 계획기간에 소련의 공업생산은 서방측의 계산으로도 연평균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는데, 이는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두 배 이상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노력들이 성과를 좀 더 거두었던 것은 1950년대와 1960년대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연평균 농업성장률이 4%를 넘어섰고, 농업분야에서도 자립기반이 확보됐다. 그 시기에도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 성장을 유지했고, 1950년대 후반에는 '화학' 공업이 중점으로 육성되어, 합성물질, 석유화학제품, 화학비료 생산 기업이 대규모로 건설됐다. 이런 전후복구와 경제 성장을 통해 1950, 60년대 소련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비된 각종 연금 보험제도가 뿌리를 내렸으며 무료 진료체계가 효율적으로 재편되어 모든 국민이 유사시나 노후의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초등과정과 중등과정의 무상 의무교육도 실시됐고,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의 수도 증가하여 청년층의 약 30%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도서관과 장서도 크게 늘어 소련인은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국민이 됐다. 예술창작과 체육활동에도 뜻만 있으면 자유롭게 참여 할 수 있었고, 1970년대 중엽까지 소련은 그럭저럭 경제 문제로 크게 고통받지 않았다. 아무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 전후복구는 이후 니키다 흐루쇼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통치 시절까지 자본주의 보다 괜찮은 생활을 인민들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기본적인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주의 맞서 손을 잡았던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소련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국과 경쟁했다. 소련에 대한 서방의 정책은 1946년에 더욱 분명해졌다. 1946년 3월 5일 미주리 주 풀턴에 았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윈스턴 처칠이한 연설은 소련을 회유하려는 어떤 시도도 거부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스탈린과 공산당 지도부가 유럽의 중심에 '철의 장막'을 쳤다고 말한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윈스턴 처칠이 '철의 장막'이라는 단어를 사용해가며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과 영국이 단결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부터 윈스턴 처칠이 우려했던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치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은 소련군이 자력으로 함락시켰고, 동유럽 인민들은 자국 내에서 반히틀러 투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을 중심으로 뭉쳐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고, 6월에는 마셜 국무장관이 유럽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마셜 플랜'을 발표했다. 이렇게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세계가 반공정책을 강화하자 스탈린과 소련도 이에 대응했다. 1947년 10월 '몰로토프 플랜'이라는 이름의 동유럽 경제부흥계획이 수립됐고, 10월에는 9개국 공산당 대표가 모여 정보와 경험의 상호교환을 목적으로 코민프름을 결성했다. 1948년에는 소련으로부터 지원받던 김일성이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가 되었고, 1949년 스탈린의 지원을 받던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내전에서 승리했다. 또한 스탈린은 1950년에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던 베트남의 호치민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이런 미소 냉전의 갈등을 격화시켰던 것은 독일 문제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은 서독지역에 독자정부를 수립하여 서유럽 사회에 편입시켜 반공과 반소의 보루로 삼으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겨갔고, 당연히 소련은 이에 반발하여 1948년 6월 동독지역 내에 있던 서베를린의 육로 출입을 봉쇄했다. 그러자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비행기로 서베를린 시민들의 생필품을 공수하기도 했다. 결국 소련은 1949년 5월에 서베를린 봉쇄를 해제하였으나, 독일이 동과 서로 분단되었다. 이렇게 해서 동유럽과 서유럽이 미소양국 세력으로 갈라지며 냉전이 심화된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군사비용을 굉장히 많이 투자했다. 그외에도 여러분야에서도 경쟁했다. 스탈린의 부하인 리브렌티 베리아는 이고르 쿠르차토프에게 핵개발 프로젝트의 기술 부문을 이끌도록 했다. 쿠르차토프는 유능한 물리학자들을 모아 팀을 만들었고, 소련 첩보기관은 미국에서 요원들이 빼낸 기밀 자료를 건네주어 그들은 계획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이 프로젝트에 아주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1949년 8월 29일 소련은 카자흐스탄에서한 핵실험이 성공하면서, 미국 다음으로 핵폭탄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소련이 만든 핵폭탄은 미국의 원자폭탄보다 강력한 수소폭탄이었다. 이를 계기로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간의 핵무기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개입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의 요청을 수차례 거부했다. 그러다 1949년에 핵개발과 중국 공산당의 통일이 있으면서, 김일성의 요청을 끝내 허락한 것이다. 물론 그가 북한에게 무기를 지원한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서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묻는 반공주의자들의 의견은 옳지 않다. 아무튼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위 서방세계는 공산주의의 공포를 조성시킬때 마다 스탈린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특히 미국은 냉전 초기 스탈린에 대한 공포심을 부각시킴에 따라 자신들의 반공체제를 강화시킬수 있었다.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됐던 소련 경제는 1940년대 중후반 부터 다시 회복됐고, 1950년대 초의 소련은 초강대국이 됐다. 한국전쟁이 진행중이던 1952년 스탈린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됐다. 스탈린은 말년에 흑해 연안 별장에서 주로 생활했다. 거기서 여유롭게 살다가 1953년 3월 5일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있었고, 그의 시신은 방부처리 되어 레닌과 더불어 레닌 묘에 전시됐다.

사후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소련의 서기장이 된 니키다 흐루쇼프는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격하하는 발언을 한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사회주의 원칙을 위반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하며 스탈린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이후 굴라그에 수감되었던 수감자 90%가 석방되었으며, 레닌과 함께 뭍혔던 스탈린은 결국 화장되어 크렘린 묘역에 안장되었다.

평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러시아에서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잔혹한 독재자라는 평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최빈국이었던 소련을 초강국으로 성장시키고 나치를 물리친 지도자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최근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러시아에선 대략 70% 정도가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한다.[15] 비록 스탈린 시절 폭압적인 통치가 있었지만,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발전하고, 나치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다 스탈린이 재건한 소련 시기 인민대중의 복지가 보장되어, 살기 좋았던 점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된 러시아인들에게는 자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향수다.

한국의 경우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스탈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박정희 시절 반공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세대들은 6.25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긴 장본인으로써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운동권의 경우 노동자 연대를 비롯한 각종 사회주의 단체에선 그의 권위주의에 매우 비판적이다. 노동자 연대 측은 그를 아예 반혁명분자로 간주한다. 즉 노동자 연대의 논리에 입각해서 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관료 계급에게 자본가를 대신하는 역할을 맡김으로써 무제한 착취를 하던 국가자본주의자다. 노동자 연대 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회주의 그룹들이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에서 스탈린주의를 추구하는 집단 혹은 단위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과 노정협(전국노동자정치협회)쪽인데, 다른 사회주의 단체들에 비해 마이너 하다. 국내에 출간된 서적들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한민국 운동권 단체들에서도 매우 안좋은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구소련권 나라들의 경우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소수민족 강제 이주와 독재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적잖게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맞서 소련을 지켜낸 것에 대해서 만큼은 높게 평가한다. 다만 1940년 소련에 편입된 발트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나 1930년대 공업화 과정에서 홀로도모르를 겪었던 우크라이나의 경우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특히나 우크라이나는 1932~33년에 발생했던 대기근에 대해 스탈린의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학살로 간주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법원에서 이에 대해 책임을 물어 기소한적도 있었다. 다만 2014년 러시아에 편입된 크림반도나 소련 시절 부터 친소련 성향이 강했던 동우크라이나 도네츠크 같은 곳에선 평가가 다르지만 말이다. 2010년 봄에 우크라이나에서 스탈린 기념 동상이 건립되자, 당해 12월 말에 머리가 잘리더니 급기야는 폭발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즉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스탈린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스탈린 시기 공업화를 진행하며 범한 실책도 있고, '폭력의 정당화'라는 점에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왜곡된 자료를 어떠한 검증없이 받아들이며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러시아에서 내리는 평가가 그렇듯이, 그는 소련이 어렵던 시절 위기를 돌파했고, 인민대중의 복지를 증진시켰으며, 히틀러에 맞서 싸워 반파시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가 분명 있다. 따라서 그런 그의 업적은 재평가가 필요하다.

관련서적

현재 국내에 출간된 스탈린 관련 전기로는 로버트 서비스가 쓴 <스탈린 강철권력>[16]과 2017년에 번역되어 출간된 올레크 흘레브뉴크의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이라는 책이 있다. 둘 다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서술된 책으로 비판적으로 읽어야할 책이다. 이 책들은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것들이고, 1990년대 국내에서 스탈린 선집이 출간되기도 했다. 다만 구하는 게 매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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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6279&cid=43027&categoryId=43027&expCategoryId=43027
  2. 현재 러시아만 보더라도 시중에 돌아다니는 농산품들 대부분이 수입산이라는 사실에서 러시아의 농업조건이 정말 까다롭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3. 이야기 러시아사 p.435
  4. 러시아 혁명사 강의 p.158
  5. 레닌 시기 창설했던 체카와 오게페우를 계승한 조직이다. 이후 엔카베데는 1950년대 소련의 KGB가 된다.
  6. 러시아 혁명사 강의 p.162
  7. 진실이 밝혀지다 p.40
  8. 맑스주의 역사 강의 p.299를 참조
  9. 독소전쟁사 p.42~43
  10.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독일에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사민당과 공산당이 대대적으로 탄압받았다.
  11. 러시아 구력은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보다 13일 정도 느리다. 따라서 11월 7일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10월 25일에 일어난 것이 되기에 10월 혁명이라 한 것이다.
  12. 독소전쟁사 p.105~106을 참조
  13. 스탈린 강철 권력 p.714~715
  14. 러시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p.412를 참조
  15. Communism Fails: 70% of Russians have a positive opinion on Joseph Stalin
  16. 2010년에 스탈린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이라는 부 제목을 달고 제 출간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둘 다 절판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