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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는 중국(+대만)의 [[김일성]]+[[이승만]]+[[박정희]]와 같은 인물이다. 그러니 김일성ㆍ이승만ㆍ박정희를 혐오하면서 장제스를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본인의 무식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다만 대한민국에는 어느정도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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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는 중국(+대만)의 [[김일성]]+[[이승만]]+[[박정희]]와 같은 인물이다. 그러니 김일성ㆍ이승만ㆍ박정희를 혐오하면서 장제스를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본인의 무식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장제스는 특유의 비민주성과 폭압적 정치로 당대(1930-40)에도 서방 언론에서는 매우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대의 영미언론에 나타난 장제스는 무능하면서도 잔인한 독재자일뿐이었다. 현재도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마찬가지며, 대륙에서는 양안통일을 염두에 둔 정치적 고려로 평가가 어느정도 높아지기는 했지만, 서방에서는 디쾨터류를 제외하면 장제스는 그저 독재자일 뿐이다.  장제스가 권모나 "자위대"가 말하는 것처럼 "중국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공산당의 비열한 속임수에 속아 대만으로 쫓겨난 현대판 유비"는 전혀 아니다.  
  
 
=== 전통적 평가 ===
 
=== 전통적 평가 ===

2020년 2월 14일 (금) 05:02 판

장제스(蔣介石, 장개석) 또는 장중정(蔣中正)은 중화민국의 초기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87년 10월 31일 청나라 저장 성 닝보 부 펑화 현에서 태어났다. 1975년 4월 5일 사망하였다. 1925년 3월 18일부터 죽는 날까지 51년간 재임했다.


초기이력

소금상인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즈칭(志淸)이며 중정(中正)은 개명한 이름이다. 제스(介石)는 전통시대 성인 남성이 본명 대신 사용하는 이름인 자(字)이다. 어릴 때는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한학을 공부했다. 17세부터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1906년 바오딩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09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였다. 이때 청조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주창한 쑨원에 동조하여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집권까지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중국으로 돌아와서 쑨원의 휘하에서 혁명군을 이끌었다. 1922년 광둥 군벌 천중밍의 반란으로 쑨원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구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1924년에는 국민당에 신설한 황푸 군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25년 쑨원이 사망하자 국민당은 우파 후한민과 좌파 왕징웨이의 쌍두체제루 운영되었고, 장제스는 그저 국민당 소속 군사지도자에 불과했으나, 국민당이 점점 군사적으로 팽창해나가면서 점점 권력이 강화되어 실질적으로 국민당에서 최대 세력을 거느린 자가 되었다. 국민당은 1926년에서 192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북벌을 단행했는데, 장제스는 이를 지휘했다. 국민당군이 북진하자 중국에 할거하던 수많은 군벌들이 국민당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장제스는 겉으로는 중국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쿠데타로 집권

역덕들은 장제스가 마치 쑨원의 정통후계자이며 합법적으로 집권한 것처럼 주장하는데 장제스는 국민정부의 군사지도자였을 뿐, 정권을 쥔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1927년 상하이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이 벌여 북벌군의 입성을 도왔는데, 장제스는 이의 뒤통수를 쳐서 국민당군 및 청방이라는 상하이 깡패를 동원하여 진압했고 이를 기화로 국공합작을 깨면서 기존의 중화민국 한커우 정부를 무력화하면서 난징정부를 선포하고 정권을 장악, 집권했다. 이러한 대학살 및 비합법적인 집권과정은 4.12 쿠데타라고 한다. 장제스는 쑨원의 유지를 내팽개치고 쿠데타로 자신의 독재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파업과 봉기로 군벌정권을 뒤흔들어 국민당군의 입성을 도운 도시노동자 및 도시빈민들이 단순히 군벌제거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새로운 진보적 질서를 수립할 것을 요구하자, 장제스는 이를 배신하고 무참히 짓밟은 것이다. 국민당의 북벌을 도운 농민들은 감조(소작세 인하) 및 토지개혁, 그리고 노동자 및 도시빈민들은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개선을 요구했고, 국민당은 이를 받아들이고 중국을 통일하면 바로 실행할 것을 약속했다.

북벌에 나선 국민당군 상당수는 공산당원 및 공산당원에 동조적인 민중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진군하면서 여러 군데서 이런 혁명적 요구를 실천하고 있었다. 이런 혁명은 상하이의 자본가들 및 외국 제국주의 세력에는 위협이었고 이들은 상하이 재벌인 천광푸(K.P. Chen)를 내세워 장제스에게 거액(당시 미화 3천만불) 을 제공하면서, 한커우에 있는 국민당 정부 대신 난징에 새로운 정부를 세울 것을 부추켰다. 장제스는 이 자금을 가지고 반공을 외치며 난징정부를 선포했고, 군사력과 자금을 쥔 장제스 앞에서 기존 국민당 한커우 정부는 비굴하게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장제스는 이런 자본가들 및 이들의 자금을 새로운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아 기존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민중을 배신한 것이다.

역사와는 거리가 먼 밀덕출신 권순욱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역덕(예를 들어 나무위키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자신의 트위터에서 막말을 일삼는 역덕 "자위대" )들은 항상 공산당이 국민당의 뒤통수를 쳐서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났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번번히 뒤통수를 친 자는 장제스이다. 장제스는 4.12 쿠데타 뿐만 아니라 제2차 국공내전도 항상 선제공격함으로써 먼저 전쟁을 개시했다. 이는 공산당이 국민당을 기습해서 국민당이 패했다고 주장하는 권순욱이나 디쾨터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또한 권순욱과 "자위대"류는 공산당이 소련에 지원을 받아서 혁명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소련의 지원을 받아 황포군관학교를 수립하고 북벌군을 조직한 것은 바로 국민당과 장제스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장제스 정권은 소련에 큰 빚을 진 셈이며, 공산당보다 훨씬 많은 지원을 소련으로부터 받았다. 권순욱과 "자위대"가 공산당이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고 비난하며 국민당 및 장제스를 옹호하는 것은 어이가 없는 내로남불일 뿐이다.

비민주성과 부족한 리더십

장제스는 1928년 난징정부 수립으로 정권을 장악했음에도 무능한 리더쉽 때문에 계속 군벌 및 당내의 도전을 받았다. (나무위키의 역덕 "자위대"는 이를 유순한 통치(!)라고 주장한다. 무능을 유순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 어이가 없을 따름) 그리하여 그는 공산당을 겨냥한 초공전 외에도 1920년대말-1930년대 중반까지 계속 주변의 군벌들과 숱한 내전을 벌인다. 당내에서는 비민주적 행태로 왕징웨이 및 기타 계파의 도전을 받았다. 장제스는 이렇게 지도권에 대한 도전은 계속 받으면서도, 정보기관 및 비밀경찰을 동원해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난징 및 상하이 및 주변지역을 철저히 감시했으며 자신에 대한 반대파를 "공산당"으로 몰아 고문하고 감방에 가두기도 했다. 심지어 말을 안듣는 언론인은 감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암살해버리기도 했다. 장제스는 대륙시절부터 자신의 영역에서는 한국의 박정희 전두환을 저리가라 하는 철권 통치를 펼쳤으며, 이는 대만으로 쫓겨가서도 변함 없어서 그가 대만에서 1949년 내린 계엄령은 그가 죽고도 12년이 지난 1987년 해제되었다.

장제스는 처음부터 민주주의의 기본도 몰랐고, 민중의 역량 같은 것은 믿지도 않았다. 그의 권력의 원천은 오직 제국주의세력과 매판세력의 자금으로 양성한 무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무력이 닿는 범위 안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범위를 조금만 벗어나면 항상 반란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장제스가 쑨원의 묘 앞에서 "중국을 통일했다"고 선언한 1928년부터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1937년까지 거의 매년 장제스군은 여러 군벌들과 전쟁을 치루었다. 디쾨터, 권순욱 및 "자위대"가 "마오쩌둥보다 훨씬 착할뿐만 아니라 능력있다"고 높이 평가하는 장제스는 그 정도 인물이었다.

무차별 학살 및 암흑가와의 결탁

나무위키 역덕들이 "민주적인 지도자"로 칭송하는 장제스는 이들이 "나쁜 지도자"로 들이대는 잣대인 학살 측면에서도 비범하지만, 역덕들은 내로남불로 일관하고 있다. 통치술로 암살과 테러를 즐겨 사용하던 장제스는 학살면에서도 다른 독재자들에 뒤지지 않는데,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공산당 및 좌파를 겨냥한 "백색테러"에서 공산당원을 비롯한 좌파지지자들 30여만명이 학살되었다. 영문위키피디아 또한 1942년 중일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허난성에서 전혀 구호대책을 세우지 않아서 300만명이 굶어죽었다. 장제스측이 전혀 대책을 세우지 않고 수수방관했기 때문에, 오죽했으면 침략자인 일본군이 기아대책을 세우는 판이었다. 물론 이는 중일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변명이 가능하긴 하지만 장제스는 자기 백성이 굶주리든 말든 아예 관심이 없었다. 여기에 중일전쟁 후 과거 일본이 지배하던 대만에 진주한 장제스군은 특유의 나사빠진 군기때문에 온갖 민폐를 끼쳤으며 결국 대만민중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자 시위대에 발포, 3만명이 사망하는 대참극이 벌어졌다. (2.28 사건)

장제스가 국민당에 참가하기 전부터 청방이라는 상하이 조폭과 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다. 청방이라고 불리던 상하이 조폭([청방])의 마약판매를 장제스 정부가 묵인해주는 대신, 장제스 정부를 대신한 반대파 탄압 및 테러, 그리고 뒷돈을 받아 챙겼다. 나무위키 역덕인 "자위대"는 장제스측이 퍼트린 공산당에 대한 흑색선전인 "마약판매설"을 마치 사실인 양 기술하고 있는데, 실제로 장제스가 청방의 두목 두웨성과 결탁해서 마약거래를 했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 사실로 공인되어 있다. 위키백과 두웨성

초공전 및 중일전쟁

장제스가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 먼저 내부를 안정시키고 나중에 외적을 물리친다)'를 내세우며 항일 전쟁보다 공산당 소탕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이자, 1936년 동북 군벌 장쉐량에 의해 감금되어 공산당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에 나설 것을 종용받게 되었다(시안사건). 결국 장제스가 이에 굴복하여 2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이며 항일 공동 전선이 성립되었다.

장제스는 국공합작 초기인 1937-38년에는 제법 싸우는 시늉을 했으나, 동부 해안지대에서 일본군에 참패한 후 직속군을 모조리 날렸고, 충칭에 틀어박혀 거의 작전을 펴지 못했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중국에 대한 작전보다는 태평양에 더 신경썼기 때문에 중국 전선은 소강상태였고, 오직 공산당 소속의 팔로군이 일본군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장제스는 일본군의 보급이 어려워지고 패색이 짙어진 1945년 여름이 되어서야 실질적인 군사작전에 나선다.

대만으로 패퇴

중일전쟁 종식 직후인 1946년 장제스는 중원 지역의 해방구를 공격하며 국공내전을 일으켰는데, 초기 전황은 국민당군이 우세했으나 결국 패주하여 1949년에 대만 섬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한편 50여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 국민당군이 진주하면서 여러 민폐 및 잔혹행위를 벌이면서 1947년 2.28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당군은 이때 대만에서 3개월간 3만여명의 학살을 벌였다. 학살의 총 책임자가 장제스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장제스군은 군기가 워낙 나빴고, 대만 뿐만 아니라 여러 수복한 지역에서 기존의 점령군인 일본군보다도 더 민중에게 잔혹행위를 벌여서 결국 스스로 발등을 찍고 말았다. 장제스군이 1948년 만주에서 참패한 것도 일부 극우 밀덕들의 주장처럼 "공산당의 달콤한 선전에 속은 중국 인민이 장제스군을 져벼렸기 때문"이라든지 "당시 만주를 점령중인 소련군이 공산군을 도왔기 때문"이 아니라 괴뢰국 만주국의 영역에서 점령군처럼 행세하면서 갖은 행패를 부리다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참패한 장제스군은 와르르 무너졌고 결국 대륙을 잃었으니 자업자득인 셈인데, 최근에 장제스를 "재평가 해야한다"는 극우역밀덕들은 장제스군의 민폐는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혹은 "공산당의 흑색선전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평가

장제스는 중국(+대만)의 김일성+이승만+박정희와 같은 인물이다. 그러니 김일성ㆍ이승만ㆍ박정희를 혐오하면서 장제스를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본인의 무식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장제스는 특유의 비민주성과 폭압적 정치로 당대(1930-40)에도 서방 언론에서는 매우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대의 영미언론에 나타난 장제스는 무능하면서도 잔인한 독재자일뿐이었다. 현재도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마찬가지며, 대륙에서는 양안통일을 염두에 둔 정치적 고려로 평가가 어느정도 높아지기는 했지만, 서방에서는 디쾨터류를 제외하면 장제스는 그저 독재자일 뿐이다. 장제스가 권모나 "자위대"가 말하는 것처럼 "중국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공산당의 비열한 속임수에 속아 대만으로 쫓겨난 현대판 유비"는 전혀 아니다.

전통적 평가

장제스는 공산화된 중국 대륙은 물론 반공주의가 지배적이었던 냉전시기의 서방, 그리고 극우 군사정권하에 있었던 대한민국에서도 평가가 매우 부정적이었다. 객관적인 행적만 봐도 장제스는 절대 민주적인 지도자라고 볼 수 없으며,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으며, 정권을 잡은 후에도 반대파를 암살, 체포, 고문하고, 상하이와 대만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노동자-민중 수만명 학살한 잔인한 독재자이자, 측근들의 전횡이나 부정축재를 방치한 부패정치인중의 표본이었다. 여기에 무능까지 겹쳐서 제2차 국공내전 초기 500만 대군을 거느리고도 겨우 120만의 병력을 거느린 인민해방군에게 참패하고 대륙을 모두 잃어버렸다. 권모와 디쾨터 등은 장제스를 옹호하기 위해 "공산당은 전쟁중 일본군과 대전을 회피하고 힘을 키웠는데, 국민당군은 일본군과 싸우느라고 약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국민당군은 위에서 보듯이 국공내전 초기 공산측보다 3-5배의 병력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일본군에게서 몰수한 무기 및 미국의 잉여무기까지 원조받아 충분한 전력을 가지고 있엇다.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싸우느라고 약화되었다며 장제스를 옹호하는 주장은 더욱 한심한데, 기본적으로 군대는 아주 소모되어 병력이 극감하지 않는 한, 실전경험이 쌓일수록 강군이되며, 권모나 디쾨터의 주장대로라면 "가만히 놀고 있었던" 공산군은 병력도 적고 실전경험이 별로 없는 약군에 불과하다. 장제스는 병력수도 충분했고 실전경험도 많은 군대를 보유했음에도 참패했으니,권모나 디쾨터 주장이 맞다손 치더라도 이는 장제스의 "무능"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물론 공산당이 항일을 안하고 놀았다는 권모나 디쾨터 주장은 당시 장제스측의 선전을 그대로 반복한 것으로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인민들은 국민당군에 비해 항일에 훨씬 적극적으로 나섰고 부패가 없었던 공산당을 긍정적으로 보았기에 민중의 지지를 얻어 승리한 것이다.(넷역덕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장제스가 여러 무능때문에 패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공산당의 승리를 "운빨"로 돌린다) 그래서 반공이 국시였던 1980년대의 대한민국의 도덕교과서조차 장제스 개인에 대해선 전혀 옹호가 없었으며, "(장제스 측근과 국민당측의) 부패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공산당측의 선전에 말려들어가 대륙을 잃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이런 주류 사학계의 장제스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지금까지 바뀐적이 없으며,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에 매우 비판적인 서방사학계조차도 장제스에 대해서는 절대 옹호하지 않는다. ( 디쾨터처럼 일관되게 옹호하는 자가 있기는 한데, 이자는 절대 사학계의 주류인사가 아니다) 유독 한국의 넷역덕 커뮤니티+디시/엠팍/일베등의 극우 커뮤니티에서만 아래 설명할 극우넷역덕+혐중세력의 합세로 이상하게 고평가받고 있다. 이는 마치 중국에서는 폭군이지만, 조선왕조시대에 임진왜란 참전 결정으로 "성군"취급을 받았던 명나라 황제인 만력제와 비슷한 면이 있다.

한국 극우의 재평가

남한의 보수우익 세력은 1990년대가 되자 박정희ㆍ전두환 군사독재 시기에서조차 독재자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던 이승만[1]을 "건국의 아버지"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일부 역덕들이 장제스를 비슷한 방법론으로 재평가하면서 한국 웹에서만 위대한 지도자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역덕들의 본진인 나무위키의 장제스/평가 항목을 보면 "유순했던 통치"라고 주장한다. 냉전시대의 한국 극우세력들도 높이 평가하지 못했던 장제스를 21세기 한국 넷우익들은 "유순했던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역사와는 거리가 먼 밀덕인 권 모라는 자가 펴낸 〈중일전쟁〉이 밀덕계와 역덕계에 일대 파장을 일으키고, 중공 깎아내리기로 (학계가 아니라) 서구 우파 언론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프랑크 디쾨터, 알렉산더 판초프 등의 저서가 한국에 번역되어 나오면서부터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은 이런 극단적 시각의 저서는 잘만 출판되지만, 통설을 충실히 반영한 장제스 및 현대 중국에 관한 저서들은 특정 인물 우상화ㆍ악마화에 뇌수가 절여져 있는 넷역덕들의 구미에 맞지 않아 보니 좀처럼 번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나무위키에 중국 현대사 항목을 작성하는 삐뚤어진 역덕들은 〈중일전쟁〉(권 모)ㆍ〈해방의 비극〉(디쾨터)ㆍ〈마오쩌둥 평전〉(판초프) 세 책을 이리저리 엮어서 유치뽕짝 반공주의 중국 현대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그러는 주제에 나뮈병들이 혐한으로 채워진 일본어 위키백과를 욕하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다.

독립유공자

임시정부 활동 등 한반도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로 1953년에 한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받았다. 장제스가 중국 인민들에게 안긴 고통의 크기와 무관하게, 이는 온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제국의 패망이 조선의 독립으로 직결될 수 있었던 것은 정상이 1943년에 전후 처리 문제 논의를 위해 이집트 카이르에서 모여(카이로 회담) 채택한 카이로 선언의 조선 민족 독립 보장 조항(특별조항)에서 비롯되었는데, 해당 조항 채택을 강력히 주장한 이가 다름아닌 장제스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지원은 장제스가 독립한 대한민국을 중국의 영향권에 두려고 한 것임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1. 21세기 애북고수들의 감각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겠지만, 본래 박정희 패거리는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를 매우 혐오했다.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했다. 1974년에 출판된 중학교 국사 교과서는 5·16 혁명은 4·19 정신의 계승이요, 발전이라 평했다. 박정희가 장면 내각을 전복시킨 쿠데타만 해도 본래 4.19 혁명을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1주기인 1961년 4월 19일에 일으키려고 했다.